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뜻 깊은 사건이다.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사건이요,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허무하게 살다가 죽어가는 인생들에게 영생의 문을 여는 사건이요, 이 세상에서 악이 결코 승리할 수 없고 반드시 선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린 제자들을 찾아 갈릴리 바닷가로 가셔서 그들에게 물고기를 잡아주시고, 아침을 먹이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다. 이 말씀은 이미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고향에 돌아와 고기잡이 어부가 되어 있는 베드로가 대답하기에 상당히 곤혹스러운 질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질문이 무슨 뜻인지 분간이 어려운 두 가지 점이 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이들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들이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버리고 온 배나 어구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 “이들”이라고 번역하는 헬라어 “투톤”이 중성 복수 지시대명사이기 때문에 물건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가 21:3에 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선동을 한 셈이니까 아마 그렇게 해석을 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의 사도직을 버리고 옛 생활로 완전히 돌아가 버렸다고 생각되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28:10). 또한 가능성은 여기서 “이들”(투톤)을 다른 제자들이라고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너의 이 동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 될 것이다. 이 경우 베드로가 그의 동료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궁금한 일이지만 여기서 예수께서는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을 맞대어 베드로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 지 묻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마치 베드로에게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처럼 생각되어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의도와는 이 상황에서 거리가 먼 것 같다.
또 다른 대답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일찍이 베드로는 예수께 목숨을 내놓고라도 주께서 가시는 곳에 따라가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다(요 13:36-38). 예수님을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그 어느 제자들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강한 사랑과 열정과 충성심을 보인 말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이러한 이유로 세 번 같은 질문을 하셨을 것이며,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그의 사랑과 충성심이 아직도 변함이 없는지 물으시는 말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그의 양떼와 교회를 맡기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데 “사랑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를 각각 다르게 사용하시니 여기에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요 21:15-17 사이에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 가운데 사용된 “사랑하다”는 동사는 “아가파오”(α’γαπα、ω) 와 “필레오”(φιλε、ω)이다. 15절에 예수께서는 “네가 나를 이들보다 나를 더 “아가파오”(α’γαπα、ω)하느냐? 라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φιλε、ω) 하시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16절에 다시 예수께서는 “아가파오”(α’γαπα、ω)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필레오”(φιλε、ω)로 대답하신다. 17절에서는 예수께서 말을 바꾸어 “필레오”(φιλε、ω)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여전히 “필레오”(φιλε、ω)로 대답하신다. 그렇다면 이 두 어휘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인가?
본문 해석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리겐을 제외한 크리스소스톰, 시릴, 어거스틴 등은 물론 종교개혁 시대의 에라스무스 같은 학자도 이 어휘 사이의 의미있는 상이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의 트렌취, 웨스트캇, 프럼머 등이 이 어휘의 차이점을 주장하고 이를 이어 스피크, 렌스키, 헨드릭슨 등이 같은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대부분의 신약학자들, 버나드, 모펫, 불트만, 바르렛, 브라운, 모리스, 비스리-머레이 등은 두 어휘의 차이점을 부정한다.
만일에 예수께서 “아가파오”(α’γαπα、ω)와 “필레오”(φιλε、ω)의 두 어휘의 차이점을 염두에 두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면 예수께서 “아가파오”(α’γαπα、ω)라고 물으시니 베드로도 “아가파오”(α’γαπα、ω)로 대답을 해야 옳다. 그러나 베드로는 꾸준하게 세 번 모두 “필레오”(φιλε、ω)로 대답한다. 세 번째는 오히려 예수께서 “필레오”(φιλε、ω)로 물으신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아가파오”(α’γαπα、ω)라는 어휘의 특별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물으셨다면 세 번째 질문도 역시 “아가파오”(α’γαπα、ω)로 물으셔야 했고, 이때야 말로 베드로는 이 곤혹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에는 예수께서 다행히 “필레오”(φιλε、ω)로 물으셨으니 베드로는 안도의 숨을 쉬어야 할 텐데 오히려 근심이 되어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과 베드로가 두 어휘 사이의 어떤 의미상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나눈 대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한 예수께서 의미하는 다른 대답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그의 양을 치라는 목자의 사명을 부여하실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이곳이 아니더라도 “아가파오”(α’γαπα、ω)와 “필레오”(φιλε、ω)를 교환 사용하는 예가 많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요한 3:16, 16:27),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3:35, 5:20),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8:42, 16:27) 등이 그 예들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대에는 히브리어나 아람어의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아하브”라는 어휘는 “아가파오”(α’γαπα、ω)와 “필레오”(φιλε、ω)를 구별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을 쓸 때, 연인 사이, 부모 사이, 친구 사이에 물론 의미는 다를 수 있을지라도 “사랑하다”라는 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히브리어나 아람어도 “아하브”라는 한 어휘를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데 있어서 “아가페”(α’γα、πη)와 “필레오”(φι、λοs) 를 구분하여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설명하려고 힘쓸 필요가 없다. 이 두 어휘는 하나의 기본적인 의미를 갖고 서로 교환사용이 가능한 어휘이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과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확신시키고, 그들의 사랑의 고백을 들으시고 양을 치는 목자로 위임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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