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죄를 알게 한다. 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상황에서 그 존재가 규정되고 그 운명이 결정됨을 알게 한다. 성서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영역에서 그리고 그 밖의 문화 사상 전반에 인간화를 실현하는데 사회적 존재로서 그리고 역사적 인간으로 사는 그 이면을 성서는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구약, 신약 모두가 약속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있다. 그리하여 구약, 신약이 인간의 구원을 지향하는 역사의 말씀임을 알게 한다. 예컨대 구약성서는 출애굽의 해방사이며 신약성서는 역사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화를 지향하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 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죄인이다. 인간이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지 않았다면 계시나 구원의 역사, 혹은 교회나 믿음이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 현실성 때문에 죄의 문제의 해결이라는 모양으로 구원의 섭리는 설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양심은 자아 중심적 고립이 삶을 파괴시키는 것에 대항하여 싸운다. 인간의 양심은 유기체적 연계성을 끊어버리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한다. 양심은 생명의 끈이 잘릴 때마다 상처를 받는다. 양심은 모든 부조화를 충격적이고 치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삶의 일치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영혼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사람은 무엇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요 삶에 대한 답이다.
이 믿음은 죄를 가진 인간에게 구원의 사실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도 인간 본래의 심정과 양심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즉 인간 본래의 심정과 양심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한다. 사랑하면 기쁘고 화를 낼 때에 괴롭고 부정한 일을 보았을 때 분개하고 자기를 희생할 때 행복을 느끼는 것에 누구나 사람은 자기의 양심이 이르는 일을 거역하고 배반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힐 뿐 아니라 이 세상살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또 양심이 이르는 바를 따르면 그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이름을 밝히고 그 힘의 능력의 빛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양심과 명성은 두 개의 사물이며, 양심은 너희에게 돌려야 할 것이고 명성은 너희 이웃에게 돌려야 한다”고 함을 알게하며 여기에 톨스토이는 “육체에 꼭 맞는 옷만을 입지 말고 양심에 꼭 맞는 옷을 입도록 하라”고 하면서 ‘좋지 않는 행동을 숨기는 것은 좋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자랑하는 것은 더욱 좋지 못한다’고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가지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으로 좋은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양심은 소유한 믿음의 분량만큼에 따라 제한을 받으며 그 효과가 발휘된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얻은 이후에 아무조건이 없이 의롭다함의 상태가 지속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면 양심은 이것과 반대되는 믿음에는 죄로 인해 자신을 살펴 크게 회개에 그 비중을 두게 하며 그리고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된다. 양심은 소유한 믿음의 분량만큼의 제한을 받으며 그리스도인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양심의 가책과 믿음’은 사랑과의 관계에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이는 나 자신과 하나님을 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거나 애쓰는 것에 있지 않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한 방향을 위해 있는 서로가 관계를 갖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관계는 믿음으로 유지 될 수 없고 깨끗한 양심을 가질 수 없다. 그리하여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순종하는 것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의 삶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다. 마음의 주인이 바뀜으로 성품과 행실이 바뀌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나타난다. 사람이 마음으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나와 하나님을 겸하여 마음, 목숨, 뜻을 다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믿음은 유지될 수 없고 깨끗한 양심을 얻거나 유지 될 수 없다. “양심의 가책”은 믿음으로 만 극복된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롬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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