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죄책고백 있어야 한국교회의 분열과 한반도 통일 열릴 것
일제하의 한국기독교는 일본제국주의의 어용교회(御用敎會)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기독교의 근본원리는 무참히 짓밟히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일본의 태양신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데라스오미가미)을 숭배하는 종교집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것은 한국기독교의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라는 의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지금의 대한예수교장로회인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38년 4월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감리교에 이어,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일본의 태양신을 섬기는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결의했다. 이로써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교회들은 문을 닫고 목회자는 모두 교회에서 쫓겨나 감옥으로 끌려갔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는 ‘이단’이 되고, 신사참배를 지지하는 교회가 ‘정통’이 된 것이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천조대신의 신사에 대한 단순한 참배에 그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한국기독교를 철저히 일본국민의 조상신들인 팔백만 잡신을 거느린 태양신 천조대신을 섬기는 요상한 우상숭배 집단으로 바꾸려 한 것이었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경신숭조(敬神崇祖)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내세우고,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혁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일본정신에 기초한 일본적 기독교를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지순례’(聖地巡禮)에 나섰다. 그들의 성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팔레스틴 땅이 아니라, 천조대신의 신궁(神宮)이 있는 일본이었다.
김응순 이승길 장운경 등 조선의 대표적 장로교 목사들은 1938년 오문환의 인솔로 당시 개통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다시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키에 도착, 먼저 교도의 ‘헤이안신궁’(平安神宮)을 참배하고, 어어서 도교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와 미에현에 있는 이세신궁(伊勢神宮), 나라에 있는 가시하라신궁’(柵原神宮)까지 순례하고 돌아왔다. 그후 이어 소위 지도급 목사들이 수없이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모두 노회나 총회에서 내노라 하는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앞장서 창씨개명을 하고, 태양신 숭배에 철저히 충실했다. 또 1945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아예 없애버리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1945년 8월 15일 졸지에 해방이 되자, 그들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파는 기독교 목사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회개’를 요구하는 반대파들을 향해서는 “너희만 감옥에서 고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온갖 수모를 겪었다”며 뻔뻔스러운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는 분열이었다. 해방 후 최초의 장로교 분열을 가져온 고신파와 재건파의 탄생은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다.
300개 장로교단은 신사참배를 회개하지 않은 결과로 나타난 죄과
오늘의 한국장로교가 300여 개에 이르는 교단으로 분열하는 등 이처럼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비의 죄를 삼사대에 이르게 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면 어떻게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이었는가를 알았다면, 해방 이후 신사참배 주도자들을 모두 교회에서 좇아내고 신앙양심을 지킨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전혀 새롭게 출발했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사참배에 앞장선 지도자들이 해방 후에도 각 지역의 대표적 교회들을 맡아 ‘회개를 촉구’하는 반대파들을 교회에서 내몰았다. 1946년 일명 남부총회에서 1938년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한다고 결의했을 뿐, 그 결의에 대한 회개나 죄책고백은 없었다.
독일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린 독일교회도 나치의 어용교회였다. 600만 유대인 살해는 독일교회의 방관과 묵인없이 저질러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일교회는 전쟁이 끝난 1945년 10월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을 통해, 당시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나치의 어용교회인 ‘독일기독교도(DC)’를 해산하고, 그 앞잡이들은 모두 교회에서 쫓아냈으며, 니뮬러 목사를 중심한 소수의 저항 집단이었던 ‘고백교회’가 그 정통성을 이어간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독일교회는 모두 ‘독일복음주의교회(EKD)’의 신앙과 양심 아래 모여 들었다.
한국기독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아직 살아 있어
한국기독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아직도 살아 있다. 해방 후 신사참배 지지자들이 전국 노회의 임원이 되고, 총회장과 총회임원이 되었다. 몇몇 양심있는 목사들이 죽기 전에 자신의 신사참배 경력을 교회 앞에 실토하고 회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목사들은 회개하지 않은 채 죽었다. 지금 한국교회가 그 정체성을 잃고 물신과 물량주의 귀신놀음에 빠져든 것은 신사참배의 열매(罪果)와 무관하지 않다. 태양신이 웅크리고 있던 그 자리에 바로 물신이 또아리를 틀었기 때문이다.
지금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이유 또한 태양신에 허리를 꺾은 신사참배죄에 대한 회개가 분명치 않은 데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그 무서운 우상숭배의 죄를 짓고도 단 한번도 진정성을 담은 죄책고백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한국교회가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주기철 목사의 복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진정성을 담은 회개이다. 이것은 우리의 조상과 선배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또 기독교 자체에서 친일인명사전 등을 발간하고, 그들 친일인사들이 자신들의 안일을 위해 일제하의 한국교회를 어떻게 능욕했는가를 소상히 밝혀 후대에 남겨야 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부터 한국교회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태양신이 웅크리고 있던 그 자리에 또아리를 틀고 앉은 기복주의 물신을 쫓아 내지 못한 채 변질된 제3의 종교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수 없을 것이다. 보라, 한국교회를 키웠다는 목회자들이 은퇴하면서 어떤 물욕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일제하의 한국기독교는 일본제국주의의 어용교회(御用敎會)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기독교의 근본원리는 무참히 짓밟히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일본의 태양신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데라스오미가미)을 숭배하는 종교집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것은 한국기독교의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라는 의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지금의 대한예수교장로회인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38년 4월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감리교에 이어,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일본의 태양신을 섬기는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결의했다. 이로써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교회들은 문을 닫고 목회자는 모두 교회에서 쫓겨나 감옥으로 끌려갔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는 ‘이단’이 되고, 신사참배를 지지하는 교회가 ‘정통’이 된 것이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천조대신의 신사에 대한 단순한 참배에 그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한국기독교를 철저히 일본국민의 조상신들인 팔백만 잡신을 거느린 태양신 천조대신을 섬기는 요상한 우상숭배 집단으로 바꾸려 한 것이었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경신숭조(敬神崇祖)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내세우고,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혁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일본정신에 기초한 일본적 기독교를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지순례’(聖地巡禮)에 나섰다. 그들의 성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팔레스틴 땅이 아니라, 천조대신의 신궁(神宮)이 있는 일본이었다.
김응순 이승길 장운경 등 조선의 대표적 장로교 목사들은 1938년 오문환의 인솔로 당시 개통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다시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키에 도착, 먼저 교도의 ‘헤이안신궁’(平安神宮)을 참배하고, 어어서 도교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와 미에현에 있는 이세신궁(伊勢神宮), 나라에 있는 가시하라신궁’(柵原神宮)까지 순례하고 돌아왔다. 그후 이어 소위 지도급 목사들이 수없이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모두 노회나 총회에서 내노라 하는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앞장서 창씨개명을 하고, 태양신 숭배에 철저히 충실했다. 또 1945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아예 없애버리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1945년 8월 15일 졸지에 해방이 되자, 그들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파는 기독교 목사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회개’를 요구하는 반대파들을 향해서는 “너희만 감옥에서 고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온갖 수모를 겪었다”며 뻔뻔스러운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는 분열이었다. 해방 후 최초의 장로교 분열을 가져온 고신파와 재건파의 탄생은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다.
300개 장로교단은 신사참배를 회개하지 않은 결과로 나타난 죄과
오늘의 한국장로교가 300여 개에 이르는 교단으로 분열하는 등 이처럼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비의 죄를 삼사대에 이르게 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면 어떻게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이었는가를 알았다면, 해방 이후 신사참배 주도자들을 모두 교회에서 좇아내고 신앙양심을 지킨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전혀 새롭게 출발했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사참배에 앞장선 지도자들이 해방 후에도 각 지역의 대표적 교회들을 맡아 ‘회개를 촉구’하는 반대파들을 교회에서 내몰았다. 1946년 일명 남부총회에서 1938년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한다고 결의했을 뿐, 그 결의에 대한 회개나 죄책고백은 없었다.
독일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린 독일교회도 나치의 어용교회였다. 600만 유대인 살해는 독일교회의 방관과 묵인없이 저질러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일교회는 전쟁이 끝난 1945년 10월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을 통해, 당시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나치의 어용교회인 ‘독일기독교도(DC)’를 해산하고, 그 앞잡이들은 모두 교회에서 쫓아냈으며, 니뮬러 목사를 중심한 소수의 저항 집단이었던 ‘고백교회’가 그 정통성을 이어간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독일교회는 모두 ‘독일복음주의교회(EKD)’의 신앙과 양심 아래 모여 들었다.
한국기독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아직 살아 있어
한국기독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아직도 살아 있다. 해방 후 신사참배 지지자들이 전국 노회의 임원이 되고, 총회장과 총회임원이 되었다. 몇몇 양심있는 목사들이 죽기 전에 자신의 신사참배 경력을 교회 앞에 실토하고 회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목사들은 회개하지 않은 채 죽었다. 지금 한국교회가 그 정체성을 잃고 물신과 물량주의 귀신놀음에 빠져든 것은 신사참배의 열매(罪果)와 무관하지 않다. 태양신이 웅크리고 있던 그 자리에 바로 물신이 또아리를 틀었기 때문이다.
지금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이유 또한 태양신에 허리를 꺾은 신사참배죄에 대한 회개가 분명치 않은 데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그 무서운 우상숭배의 죄를 짓고도 단 한번도 진정성을 담은 죄책고백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한국교회가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주기철 목사의 복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진정성을 담은 회개이다. 이것은 우리의 조상과 선배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또 기독교 자체에서 친일인명사전 등을 발간하고, 그들 친일인사들이 자신들의 안일을 위해 일제하의 한국교회를 어떻게 능욕했는가를 소상히 밝혀 후대에 남겨야 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부터 한국교회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태양신이 웅크리고 있던 그 자리에 또아리를 틀고 앉은 기복주의 물신을 쫓아 내지 못한 채 변질된 제3의 종교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수 없을 것이다. 보라, 한국교회를 키웠다는 목회자들이 은퇴하면서 어떤 물욕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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