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본고는 지난 7월 19일 열린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 발표회 ‘신앙 선배들의 가난과 고난과 섬김의 삶을 기리며’에서 김명혁 목사가 이성봉 목사에 대해 발제한 원고를 소개한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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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부흥사 이성봉 목사님(1900-1965)께서 우리 곁을 떠나 주님의 품으로 가신지 50여 년이 지났지만 그분이 한국교회와 우리들의 가슴에 남기고 간 주님 사랑과 영혼 사랑의 순수함과 뜨거움은 아직도 냉랭해진 우리들의 가슴에 모닥불을 피우는 영원한 불꽃이 되고 있습니다. 그분은 한 평생을 편안하게 살지 않았으므로 장수하지 못하고 65세의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주님과 복음 전파를 위하여 다른 사역자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면서 가난과 고난과 섬김의 길을 걸어가는 값진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세기에 십여 명씩 귀중하게 쓰시는 당신 마음에 합한 종들을 이 땅에 보내시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귀중하게 쓰시던 길선주, 이기풍, 최봉석, 김익두, 이성봉, 주기철, 손양원, 한경직, 박윤선, 방지일 목사님들과 같은 충성된 종들을 다시 보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성봉 목사님의 “은혜 체험적 삶”과 함께 “가난과 고난과 섬김의 삶”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해서 발표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은혜 체험적” 삶이었습니다.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이인실 씨와 김진실 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성봉은 복음이 간리에 전해진 해인 1905년(6살 때)부터 어머니의 철저한 신앙의 훈련과 감화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성봉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성경을 읽게 했습니다. 성봉은 6살 때 신약을 일독했고 예배당에서 “누구든지 성신이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하시오” 하면 즉시 기도를 해서 칭찬을 받곤 했습니다.
소년 이성봉은 김익두 목사님이 운영하시던 황해도 신천의 경신소학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김익두 목사님의 신앙적 감화를 받으며 김익두 목사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청년 시절 이성봉은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3년 동안의 투병생활은 청년 이성봉으로 하여금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히게 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손길에 붙잡히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 이성봉은 1925년 동양선교회 성서신학원(현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하여 3년 동안 신앙 훈련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깊은 회개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성서신학원을 졸업하자 이성봉 전도사는 목회와 부흥 사역에 투신했습니다. 1928년부터 3년 동안 계속한 수원에서의 목회사역과 부흥사역에 회개의 역사와 함께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고 이성봉 전도사 자신은 신비한 영적 체험을 했습니다. 1931년부터 6년 동안 계속한 목포에서의 목회사역과 부흥사역에도 회개의 역사와 함께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렇다고 이성봉 목사가(1932년에 목사 안수) 신비주의를 주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목포교회에서 목회할 때 신비주의로 나가는 여신도를 책벌한 일이 있는데 앙심을 품은 그 여신도의 아들에게 폭행과 모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1936년 신의주 동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부흥사로 활동하게 되었는 데 1937년 서울에서 모인 성결교 총회 기간 동안 이성봉 목사님은 성령의 뜨거운 불 세례를 체험했습니다. 총회 기간 동안 피곤한 몸을 잠깐 쉬고 있는데 당시 유명한 부흥사인 김익두 목사님이 다가와서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는데 그의 손이 닿자마자 너무나 뜨거워 깜짝 놀라 침대에서 뛰어 올랐다가 떨어졌는데 꿈이었습니다.
그날 밤 총회 회의에서 그는 전국 부흥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937년부터 이성봉 목사님은 능력의 사자로 가는 곳마다 강한 성령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1937년 용정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는 2,000여 명이 회개하여 자복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1938년에는 한 해 동안에 50여 회 이상 부흥회를 인도하며 회개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1928년 수원에서 목회와 부흥사역을 시작한 후 1965년 7월 23일 성결교 합동총회에서 “주를 사랑하자” 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설교를 하고 8월 2일 주님 품으로 돌아가기까지 37년 동안 한국과 만주와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수많은 부흥회를 인도하는 동안 자기 스스로 수많은 영적 체험을 계속하며 기사와 이적을 동반하는 회개와 부흥의 역사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항상 경계했습니다. 지식과 기술과 경영과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고 있는 현대교회 목회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은혜 체험과 성령의 역사에 붙잡혀서 한 평생을 살며 사역한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우리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구령과 교회부흥에 헌신한 수고와 고난과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잠자는 교회를 일깨우기 위해 농어촌 교회까지 찾아가서 부흥회를 인도한 부흥사의 삶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모든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심지어 청주에서 있었든 셋째 딸의 결혼식에 인사하러 올라가서도 몇 마디 인사를 하고는 이어 전도 강연을 했습니다. “그의 눈 앞에는 세상의 부귀영화는 아랑곳 없었고 명예 지위도 거들떠 볼 새도 없이 다만 한 영혼에게라도 더 많이 전도 구령하겠다는 일념에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령의 사명 완수를 위해서 그의 온 정력 모든 시간과 물질과 심지어 가족까지 다 희생의 제물로 주님께 바쳤습니다. 순회 집회하는 부흥 목사로 불가피하게 가족을 위해서 작은 집 한 채를 준비했던 일이 있는데 얼마 안 가서 어떤 교회 건축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근근이 장만한 그 집을 선뜻 팔아 전도사의 손에 들려주고 가족은 셋방으로 옮아 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만주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어머니 병환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성봉 목사님은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결국 어머니를 주님께 맡기고 집회를 계속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6·25 동란 이후에는 무너진 성결교회 제단 하나하나를 다시 세우는 교회 재건 운동을 일으켰고 마지막에는 일체의 큰 집회나 외부 집회를 단절하고 매일 수십 리씩 걸어 다니며 농어촌 교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소 구루마로 덜커덩 덜커덩 돌아다니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리어카를 타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자전거 꽁무니에 타고 가다가 험한 길에 넘어져서 버드럭 거리기도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때로는 트럭 신세도 졌습니다. 장마통에 지게로 전도 기구를 짊어지고 걷기도 했습니다. 고장난 차를 떠밀고 대관령에서 비를 흠뻑 맞아가며 넘기도 했습니다. 새벽 차를 타고 종일 차 속에서 시달려 정신을 못 차리고 허덕일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밤낮 침식을 잊고 하루에 천여 리를 차 속에서 산 때도 드문드문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때로는 1년에 82곳의 집회를 인도했고 때로는 하루에 5, 6회의 집회를 인도하다가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순수한 구령과 복음 전파보다는 자기 교회 확장에 그리고 자기 희생보다는 대우 받음에 치중하고 있는 현대교회 목회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영혼 사랑과 교회 사랑에 사로잡혀 복음 전파에 한 평생을 헌신하며 수고와 고난과 섬김의 길을 걸어가신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우리들에게 감동적인 도전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현세를 초월한 깨끗한 청빈의 삶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청년 시절부터 철저한 회개에 기초를 둔 성결하고 깨끗한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어떤 애착을 두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성의 정욕과 물질의 탐욕을 항상 경계하는 금욕적 삶을 살았습니다. 돈과 이성의 유혹에 빠지면 목회자의 삶은 끝장이란 말을 거듭해서 강조했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거듭해서 경고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일종의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정서가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부흥회 때마다 “허사가”를 즐겨 부르곤 했습니다. “꿈결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 일생의 향락 좋대도 바람을 잡누나 험한 세월 고난 풍파 일장 춘몽이 아닌가 슬프도다 인생들아 어디로 달려 가느냐”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영화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 옥답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그래서 정성구 교수는 이성봉 목사님은 “성경과 복음으로 시작해서 허무주의로 마감하는 느낌이다”라고 혹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성봉 목사님의 “허무주의적 정서”를 비판적으로만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세 부정을 통한 현세 긍정적 신앙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세 부정을 통한 내세 긍정적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현세 부정적 요소가 나타나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빌4:7-8).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과 설교에 일종의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정서가 나타나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현실 교회와 사회에 대해 무책임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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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이성봉 목사의 가난과 고난과 섬김의 삶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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