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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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황주 출생
이인식(李仁植 1889. 11. 4~1950. 6)목사는 황해도 황주(黃洲)에서 출생하였다. 18세 때 기독교에 입신하여 신앙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21세 때에 전도사로 임명되어 선교사들의 지도로 사역한 바 있으며, 나중에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가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1917년 6월 제9회로 졸업하였다.
함께 졸업한 강규찬 김학린 김병조 김창선 김응규 박상순 변린서 이만집 등과 함께 평양노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목사로 장립받았으며, 이들 중에는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한 동기생들이 가장 많았다. 그 가운데 두드러진 활동가는 경북노회 자치운동의 선구자였던 이만집(李萬集) 목사가 있고, 또 평북노회 의주읍교회 김병조(金秉祚) 목사는 역사적인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에 서명했던 33인 중의 1인이기도 하다.
한때는 황주읍 안성교착 교학을 역임하기도 하였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이사와  서울고등성경학교(高等聖經學校) 교장과 평양노회 노회장을 역임했다. 후에 경기노회(京畿老會)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한국기독교대사전, 박용규 편, 성은출판사, 1978,  p.683 참조).
1934년 9월 7일 오후 8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3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회집되었다. 목사 회원 78명, 장로회원 78명, 선교사 회원 37명 합계 193명이 모여 뜻깊은 한국기독교선교50주년(禧年) 총회를 맞이 한 것이다. 이인식 목사는 이 희년 총회의 총회장이 되었다.
제23회 총회는 제22회 총회장 장홍범(張弘範) 목사의 사회로 히브리서 9장 11절~22절을 봉독한 후 “구원의 도는 피가 중심”이란 제목으로 총회장이 설교를 하였고, 총회장 장 목사가 개회를 선언하자 곧 임원선출에 들어가 투표하니 평양노회 기림교회(箕林敎會)를 맡아 시무하고 있던 이인식 목사가 제23회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1934년은 최초선교사 알렌의 내한 50주년
50주년 희년총회 암스트롱 박사의 희년 기념강연회
필리핀 복음교회·캐나다연합교회·미국교회 대표 등 축사
장로회신학교 초대 교장 마포삼열 목사가 축도
총회 50년 약사 및 50주년 기념 주석 간행

총회장으로 선출된 이인식 목사는 그 어느해 보다 의미있는 한해를 맞이하였다. 1884년 9월 20일 조선선교의 선두주자로 입국했던 미국 북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 : 알련 1984~1905)부산을 경유, 제물포(오늘의 인천)로 내한하여 경성(京城)에 입국한 첫 공식 선교역사(Public Missionary)를 쓴지 꼭 반세기(半世紀)가 되는 해였기 때문이었다.

의료선교사 알렌의 사역
여기에서 잠시 호에리스 N. 알렌의 사역에 대해 언급해 두고자 한다. 알렌(Horace N. Allen. 1858. 4. 23~1932. 12. 11.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이 출생)은 1881년 오하이오 웨슬리안(Ohio Wesleyan)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졸업하자마자 1883년 마이아미 의과대학(Miami Medical College)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의학박사(M.D)가 되었다.
1883년 10월 의과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의료선교사로 처음으로 중국상해에 파송되었고, 1884년 9월 22일 조선의 첫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처음엔 아직 공식 선교사역이 어려워 공사관 소속  부속의사로 임명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 민영익이 부상당한 상처를 치료해 준 사건으로 조선정부(朝鮮政府) 임금의 시의(侍醫)로 임명되었다.
1885년 4월 10일 오늘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부설 세브란스병원의 모체가 된 제중원(濟衆院 혹은 廣惠院이라고도 하는)을 설립하여 공식적으로 의료활동을 하게 되었다. 1887년에는 동료선교사들과사이에 야기된 갈등으로 의료선교사역을 잠시 중단하기도 하였다.
1887년~1889년 어간에는 조선 공사관 서기관(書記官)으로 미국 워싱턴에 주재하다가 공직을 사퇴했다. 이후 1890년에는 해외선교부 의료선교사로 다시 내한하여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직과 대리공사(代理公使)와 주한 미국공사(駐韓美國公使)를 역임하였다.
1905년 3월에는 루즈밸트(D. Rosevelt) 대통령에 의해 공사직을 파면 당한 후 그해 6월 10일 미국으로 돌아가 의료사업에서 은퇴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32년 12월 11일 고향인 오하이오주 도래도(Torede)에서 영민하였다.
알렌은 미국과 조선 사이에 의료선교사로서만 아니라 외교관으로서 혁혁한 공을 쌓은 우리 한국과 한국교회와는 선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내한선교사 총람, 김승태 박혜진 공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p.98 참조).
알렌이 내한한 때부터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이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이인식 목사는 희년(禧年) 행사를 관리하기 위해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우선 총회로 모였던 평양 서문밖교회 정문에는 “祝 第23回 朝鮮예수敎長老會總會場”이란 글 밑에 1934년 9월 7일~14일 이란 글씨가 쓰여 있으며, 오른쪽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와 왼쪽엔 <祝 五十週年禧年>이란 큰 글씨가 쓰여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총대들은 미쳐 생각하지 못했었지만 이러한 프랭카드가 내걸린 것을 보고 모두들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총회에 임하게 되었다.

희년 총회는 외국의 교단 지도자들 다수 참석
조선장로교회가 희년을 맞이하자 외국으로부터 여러 교단의 지도자들이 축하객으로 참석해 축사를 하였다. 먼저 필리핀복음교회(Philiphine Evangelieal Church) 엄 리오팬도 목사가 첫번째로 축사하였다. 다음에는 카나다연합교회 대표요, 선교부 총무인 암스트롱(Amstrong) 박사가 축하인사를 하였다. 한국에 첫 선교사를 파송했던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 대표로 맥가피(Dr. Mcgaphy) 박사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여 총회를 더욱 빛내었다.
한편 회의 기간 중에 카나다 선교부 총무 암스트롱 박사의 희년 기념강연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그 강연회에 참석한 총대들은 희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로서는 자랑스러운 강연이었다고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총회가 시작된지 사흘째 되던 9월 9일에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운동장에 2만여명의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암스트롱 박사의 강연을 들었다. 이날 행사는 총회장 이인식 목사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희년행사는 계속이어졌다.  
1934년 9월 9일 숭실전문학교 강당에서 총회장 이인식 목사의 사회로 희년기념음악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평양시내 연합찬양대의 합창과 특별출연한 숭의여학교 찬양대, 숭실전문학교의 취주악단의 순서가 있었다. 이날 기념사는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가 맡았으며, 마지막 축도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창설자요, 초대교장인 마포삼열(Samel Moflett) 목사가 맡았다.
특별히 희년 총회를 맞이하여 이인식 목사는 역사의식이 강하여 평양에 있는 <마포삼열기념관>에서 각종 역사자료를 전시하였다. 이때 1873년 만주에서 활동했던 스코트랜드(Scotland) 존 로쓰(John Ross) 선교사의 성경번역에 대한 역사를 잘 전시하여 모든 총대들은 물론 평양 근방에 있는 여러 교회 교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105-106 참조).
이인식 목사가 재직했던 제23회 총회  결의안을 보면, ① 총회 50년 약사 및 기념화보를 제작 출판하기로 하다. ② 50주년 총회 기념 주석을 간행하기로 하다. ③ 의산(義山)노회를 분리키로 하다(의산노회·심산노회로). ④ 총회 산하 노회 중 재단허가 받은 노회가 10개 노회임을 보고 하다.
이렇게 희년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인식 목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곧 고향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가 북한교회 재건사업에 힘을 쏟다가 1950년 6.25 전쟁 중에 생을 마감하였다(제100회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 총회사무국 편, 2015, p.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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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제23회 총회장 이인식(李仁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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