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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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청도 금천 출신
임태득(林太得 1937.3.20~2009.12.2) 목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조국의 운명이 이미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간지 오래였고, 고향 금천은 대구에서도 한참이나 남쪽 경산을 지나 첩첩산중이었다. 이곳엔 불교의 대사찰 가운데 특히 여성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설치된 승가대학(僧伽大學)이 병설되어 있는 운문사(雲門寺)가 가까이 있는 시골이다. 이곳은 삼국유사(三國遺史)란 사서(史書)를 남긴 일연(一然)의 고향이기도 하다.
당시만 해도 한 해가 멀다하고 찾아드는 가뭄 때문에 백성들은 문자 그대로 척박한 농토에서 나는 것으로 먹을 것이 턱없이 모자랐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야 하는 가난한 시절이었다.
소년 임태득도 이 비참한 환경을 피할 수 없었다. 남의 땅 마지기 겨우 얻어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 하는 형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임태득이 태어난 금천면 소재지엔 당시 일인(日人)들이 세운 소학교(김전국민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부모들이 아들을 이 학교에 입학시켜 공부하게 하였다. 무엇보다 태득에게는 학과목모다는 친구들을 만나고 사귀는 것이 그렇게 즐거웠다.
이럴 즈음 마을에서 대구로 나가 먼저 복음을 전해 받은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임태득 소년이 살고 있는 갈지 마을에도 드디어 기독교 복음이 전해졌다. 마을 사랑방을 빌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갈지교회가 된 것이다.
태득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교회에 가니 찬송도 배우고 성경말씀도 듣게되니 그렇게도 좋았다. 얼마 되지 않아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다.

대구 동산성경학원 출신
대구 대명교회에서 32여년간 목회
교정(敎政)에 능해 총회 행정에 두루 책임 맡아
지역노회와 무지역 노회간 이거 금지 결의
총회은급부 벽제 추모관 매입 실패 사례도


태득 소년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을 하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이 여의치 못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미북장로교 대구선교본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대구성경학교(동산성경전문학교)를 알게 되었다. 무조건 대구 남산동(南山洞)에 있는 성경학교를 찾아가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했다. 담임전도사님의 추천을 받아 오라고 했다.
집에 돌아온 태득은 교회를 찾아가 전도사님에게 사실을 고하고 추천을 받게되어 동산성경학원에 입학, 그곳에서 고등과반까지 마치고, 대한장로회신학교(현  대신대학교전신)로 진학해 4년 간의 신학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서울 사당동에 있는 총신대학교 신학원에 진학하여 제60회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게 된다.
졸업 후 대구서현교회에서 강도사로 시무하고 있던 중 1971년 4월 11일 대구 앞산(비슬산) 밑 미군부대(Camp Henry) 옆 대명교회(大明敎會, 1915년 11월 설립)로 임지를 옮겨(당시 박장동 목사 시무) 부목사를 거쳐 2005년 원로목사로 추대받기까지 31년 간의 목회생활을 명예롭게 바치었다.
임태득 목사는 1963년 양의순을 사모로 맞이하여 승리로운 목회를 했을 뿐만 아니라, 슬하에 3남1녀의 자녀를 얻었으며, 장남 임수진은 워싱턴 우리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고, 3남 임동진은 리치버그 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다. 임태득 목사가 대구 대명교회 오직 한 교회에서 32년 동안 승리로운 목회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격이 황소같은 우직함과 성실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음으론 그의 기도생활로 일관한 점과 한번 작정하면 끝까지 목표를 향해 밀어부치는 적극성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대명교회에 부임 이후 몇 차례나 성전건물을 리모델링을 하고 때로는 개축과 증축을 했으며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였다. 교회건물을 신축할 때마다 인근 주택을 매입하고 교육관을 지으며 부지를 확장할려고 해도 지주들이 비싼값을 요구했을 때 어처구니 없었지만 기간에 구애치 않고 금식기도로 때로는 산기도로 해결하였다.
박장동 목사의 사임으로 당회장이 된 임태득 목사의 위임식(1973년 4월 24일) 때 당시 중시찰 위임국장 이종호 목사의 사회와 당시 서현교회 담임목사였던 박원섭 목사가(내가 받은 성직, 고전 15장 9절~11절) 메세지를 전했는데, 후일 임태득 목사는 어려운 일을 맞이할 때마다 위임식 때 받은 말씀의 교훈을 되새기며 처음으로 돌아가 새힘을 얻었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목회를 함께 지켜본 당회원 장로들과 권사들은 한결같이 임태득 목사의 의욕적이고도 진취적이며 열정적인 목회활동을 이구동성으로 말했으며, 어려운 일에 직면할 때마다 그의 40일 금식기도 하는 모습이 성도들에겐 황소같은 기질의 기도와 목회의 뚝심에 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대명교회80년사, 1915-1955, 대명교회80년사편찬위원회편, 대명교회 1995, 대구 p.155-157 참조).
임태득 목사는 자신이 비교적 많이 배우지 못한 탓이었는지 모르지만, 교회 안에서 자라고 있는 아동들과 학생들 나아가서는 성인된 장년들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대명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유독 교육관 건립에 정성을 쏟았고 어린이들을 위해서 유치원을 개설, 교인들의 자녀들과 교회인근 주민들의 자녀를 위하여 당국의 허가를 받아 유치원을 열어 간접선교에 심혈을 기울이며 교회내 다음세대 육성을 위해 중고, 대학, 청년 뿐만 아니라 장년부 주일학교를 통해 성경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이웃 노인들 선교를 위하여 매년 경로잔치를 열어 젊은이들에게 노인과 부모공경의 모습을 실천으로 산 교육을 하였다.
지금은 그 풍습이 다 사라졌지만 교회 내 친교와 재충전을 위해 해마다 야외예배 행사를 통해 성도들 간의 우의를 도모해 갔으며, 새신자들이 이런 기회를 통해 교회의 풍습을 익혀 가게 하였다(대명교회80년사 같은책 p. 215).  
뿐만 아니라 임태득 목사는 세계선교에도 관심을 기울여 우선 단독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 이미 파송되어 있는 선교사들에게 협력 선교사로서 시작 선교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임 목사의 목회활동을 당회에서 인정하고 임 목사에게 총회가 운영하고 있는 목회대학원(牧會大學院) 입학을 허락하였으며, 또 한편 이스라엘과 애굽을 탐사할 수 있는 성지순례를 허락하였다(대명교회80년사 같은책 p.217).
뿐만아니라 1983년 6월에는 서울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이 주관하는 하기 목회자 세미나 및 1992년 5월에는 L.A 소재 리품드대학(Reforned College)에 한 학기 수학하는 연수교육참여에 교회가 협력했다. 임목사는 개인적으로 늘 목회하면서 자기 개발에 힘썼다.
한편 그는 교정(敎政)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대명교회가 속한 대구노회 노회장을 비롯, 대신대학교 운영이사장 및 총신대학교 운영이사장도 역임하였고, 총회에서도 재정부장, 구제부장, 유지재단 이사장, 총회세계 선교부 총재, 재판국장과 총회순교자기념 사업부장, 전국 영남교직자협의회 초대회장, 기독신문사 이사장, 기독교TV(CTS) 공동대표이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는 2003년 9월 23일에서 26일까지 대구 동신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8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교단의 수장(首長)에 올랐다.
그가 재직했던 제88회 총회에서 가결된 중요 안건들을 살펴보면, ① 군목(軍牧) 나이 수정의 건은 입대자격이 갖추어지면 안수하기로 가결하다. ② 부목사는 동일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받을 수 없다. ③ 지역노회에 속한 교회가 무지역노회로 이거할 수 없다. ④ 무지역노회에서 무지역노회로의 이거는 절차를 밟아 옮길 수 있다. ⑤ 교회간 거리 위법의 경우 노회로 하여금 행정적 제제조치(당회장권 제제)를 하도록 하다. ⑥ 은급기금 관계없이 총회 모든 서류는 발급해 주기로 하다.
제88회 총회장으로 수고했던 임태득 목사는 총회장직에서 몰러난 후에도 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 두 가지 사건을 두고두고 애석하고  안타까운 여운이 남아 있다. 하나는 사당동 총신대학교 채플시간에 여목사제도를 반대하면서 ‘기저귀’ 운운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총회장 재직시 은급부가 벽제 추모관 매입의 결과로 야기된 교단연금(유용) 사건이다.
그는 73세의 나이가 되기까지 교회의 지도자로 교단의 지도자로 살아오면서 늦게는 당뇨로 약간의 병고를 겪다가 소천하여 2009년 12월 2일 그가 평생 섬기었던 대구 대명교회에서 성도들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회장(總會葬)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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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제88회 총회장 임태득(林太得)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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