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부산 출신
김덕신(金德信 1929. 8. 20~2009. 11. 18) 목사는 고향이 경상남도 부산 출신으로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태어난 1930년대는 조선의 국권이 이미 상실된지 오래되었고, 민생들의 생활고는 그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피폐될 대로 피폐되어 어린 덕신에게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다. 교육다운 교육의 기회를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태어나 성장한 항구도시 부산만해도 늘 외침의 전초기지로 지역이 낙후한 가난과 혼란의 도시였다.
물려받은 재화(財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보다 특별한 환경에서 자란 것도 아니었지만 어릴적 가까운 이웃에 있는 교회에서 듣고 배운 어슴프레한 예수님에 대해 들은 성경 이야기가 늘 덕신 소년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남이 읽다가 버린 책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책 읽는 습관이 몸에 베였다. 어떤 때는 밤새껏 호롱불을 밝혀놓고 신문이나 잡지로부터 쪽복음성경 등을 밤새워 읽었고, 때로는 당시에 향학열에 불타고 있던 조선 청소년들을 위한 일본의 유수한 대학들이 펴낸 통신강좌 교재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고향을 등지고 대구로 온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날 당시로서는 대구 유일의 정부(문교부)인가 신학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공평동(중구)에 있는 최정원(催正元) 목사가 교장으로 있는 대구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 학교는 후에 대한장로회신학교(합동측)와 재단이 합해져 대신대학교(경산 소재)로 병합되었지만, 6.25 전쟁이 막 끝나고 혼란한 와중에서도 대구와 경남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로는 호남지방에서까지 성경을 잘 가르친다는 최정원 목사(기독교성결교 소속)의 소문을 듣고 젊은 기독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최정원 목사는 명성 그대로 전국에서 청함을 받고 있는 유명한 부흥강사였고 신학교수였다. 친히 개척해 세운 공평동교회는 성경박사로 통하는 최 목사가 세운 신학교와 함께 소문난 교회라 전쟁과 가난으로 찌든 소망없는 서민들에겐 큰 위로와 소망이 있는 복음의 현장이었다.
그가 세운 신학교는 3년제였지만 교파를 초월해 전국에서 영혼이 갈급하고 전쟁에 시달리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시내에 있는 큰 장로교회에 나가는 현직 집사와 장로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을 이루고 있는 공장장들에 이르기까지 계층을 초월해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최 목사는 기도할 때 눈을 뜨고 오늘날 겟세마네 동산을 배경으로 한 예수님처럼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마주잡고 기도하였다. 한번은 새벽기도회 때 당시 신학교 학생들이 최 목사를 시험하기 위해 어느 간 큰 학생(김종규 목사 증언, 현 예장통합 은퇴목사)이 살금살금 기어나가 그가 기도하는 얼굴 앞에 오른손을 들고 슬쩍 지나쳤는데 눈 한번 깜짝하지 않더라고 했다. 그 이후부터 신학생들 사이에는 진짜목사라는 별명이 나돌았고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김덕신 청년이 바로 이 최정원 목사를 극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 6.25 전쟁 직후 혼란했던 대구에 생활터전을 잡고 있을 때 생긴 생애의 전환기가 될 줄이야…
임마누엘파 대구신학교 졸업
신정교회(서문교회)서 정재순 목사에 영향 받아
북일·서부·동부교회 시무
대신대학교 실천신학 교수로 활동
동부교회서 손계웅 목사 이어 2대 총회장
신정교회(서문교회)서 정재순 목사에 영향 받아
북일·서부·동부교회 시무
대신대학교 실천신학 교수로 활동
동부교회서 손계웅 목사 이어 2대 총회장
김덕신이 대구에 왔을 때 출석한 교회는 대신동 서문시장 가까이에 있는 신정교회(新町敎會, 현 서문교회)였다. 그는 당시 대구 경북지역의 기라성 같았던 정재순(鄭在淳) 목사가 신정교회를 담임하고 있어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 이전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1928. 제17회)을 역임한 염봉남 목사가 시무했었던 교회였다.
이런한 배경에서 신앙이 성장했던지 그가 목회한 목양지도 시내에 있는 북일교회(北一敎會), 서부교회(西部敎會)와 마지막 임지였던 대구 동부교회(東部敎會)이다. 한때 그는 최정원 목사가 운영하는 대구신학교 성결교단에서 운영하는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 현 서울신학대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교리의 오해를 산 적도 있었으나 그의 신앙의 뿌리와 기준은 장로교회였다.
그는 대구신학교 졸업 후 명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공부했고(1977), 1981년엔 미국 Prince George College에 가서 공부한 적도 있으며, 1982년엔 Faith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박사(D.Min) 학위과정을 마치기도 하였다.
김덕신 목사가 이렇게 독학으로 시작하여 정식으로 학교교육을 받기까지 있었던 요인은 그의 강인했던 건강과 뜨거운 향학열의가 일구어낸 산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사역했던 북일교회(현 서석수 목사 시무)와 서부교회(현 남태섭 목사 시무)와 동부교회(현 김서택 목사 시무) 교인들의 공통된 김 목사에 대한 평가를 참고해 보면, 첫째 독서를 엄청나게 많이 하는 분이다. 둘째 무슨 일이든지 한번 시작하면 철두철미하다. 셋째 그의 끊임없는 학구열을 든다. 넷째 기도를 하면 성취할 때까지 뿌리를 뽑았다고 한다. 다섯째 당회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의 의견을 다 들어주는 스타일의 지도자이다. 여섯째 설교 중에는 예화를 사용, 일반인들에게 복음을 이해시키는 장끼가 있었다고 했다.
한 번은 같은 지방에서 김 목사와 겪은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하면, 대구 대신동에 있는 기독교서점에서 만났는데, 어떻게 나오셨느나고 인사를 했더니 다음 학기 강의시간이 이단종파연구라고 하면서 두 세권의 중요서적만 구입하면 될 것을 20권이 넘는 이단 관련서적을 몽땅사서 보따리를 꾸리는 것이었다. 목사님 두 세 권 사서 보시면 될터인데 왜 이렇게 많은 양의 책을 구입하시느냐 했더니 요즈음 학생들 가르칠려면 교수가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가르칠 수 없다고 하면서 그 많은 책을 타고 온 차 트렁크에 싣고 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대구 동부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었던 정태호 목사 증언에 의하면, 김덕신 목사의 목회의 중점은 주일낮 설교에 있었고 주일 낮 예배가 11시에 시작되면 오후 1시 넘기기를 예사였다고 한다. 한편의 설교준비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고 하면 주일이 지나도 매일 그의 서제엔 새벽 1시 2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을 정도로 책을 많이 읽고 설교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동부교회에서 교회를 개척해 일생을 바쳐 30년 3개월의 세월을 마치고 은퇴한 전임자 손계웅 목사의 바톤을 이어 받아 1976년 부임하여 2000년 1월 21일 은퇴, 동부교회 원로로 추대받았으며, 그는 교정(敎政) 활동에도 두각을 나타내었고, 지역교회와 지역사회 지도자로서도 큰 몫을 감당하였다.
1955년 목사 장립을 받은 후 오늘날 대 교회들로 부흥 성장하고 있는 대구 북일교회와 서부교회를 비롯 대구 동부교회를 마지막 임지로 끝내면서, 가장 오랜기간 동안 목회사역과 함께 힘쓴 일이 있다면 그가 심혈을 기울여 기여한 1975년부터 시작된 그의 모교이기도 한 대신대학교에서의 실천신학교수 사역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하겠다.
그는 목회학과 설교학 뿐만 아니라 이단종파연구 및 예배학에 이르기까지 교육사역에 큰 보람을 느끼며 후배를 양성하였다.
1993년 9월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피선되어, 1994년 9월 27일에서 30일까지 그가 시무하고 있던 대구 동부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9회 총회에서 교단 총회장으로 피선, 교단을 위하여 1년간 혼신의 정력을 다해 교단 수장으로써의 사명을 다하였다. 김덕신 목사가 총회장에 당선되므로 동부교회는 손계웅 목사(1968. 9. 제53회 총회)에 이어 두 사람의 총회장을 배출한 교회가 되었다.
김덕신 목사가 재임했던 제79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교단정책위원회를 부활시켜 규칙대로 시행하기로 하다. ② 선거공영제를 도입 실시키로 결의하다. ③ 성경공회를 전면 개편해 재추진하기로 결의하다. ④ 이단조사연구위원회를 조직해 상설기구화 하기로 가결하다. ⑤ 지역노회 경내의 타지역 노회소속 교회는 해당지역 노회로 보내기로 가결하다. 단, (1) 무지역노회는 제외키로 (2) 분리 당시 총회가 인정한 것은 제외하기로 하다.
김덕신 목사는 퇴임 후 미국에 있는 자녀들의 집에서 기거하다가 2009년 11월 18일 서거하였다.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한 가지 안타까웠던 점이 있다면 그가 총회장을 지낸 후 후배들에게 ‘내가 총회장을 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하면서 후배들에게 전언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총회장 되던 해의 개혁측의 분리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었고, 생애 마지막엔 주위의 사람들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매우 미약했다는 후문은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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