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대륙 남쪽에 위치하는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이 1833년에 식민지화한 이래 아르헨티나와는 영유권을 두고 승강이가 가시지 않았다.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 영국은 “통치는 계속하되 주권은 아르헨티나에게 이양해도 좋다”며 한 발 물러선다. 1981년 12월, 정권을 잡은 갈티에리 장군이 주도하는 군사정권이, 실패한 경제정책으로부터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해, 1982년 4월 2일,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자, 영국은 즉각 항공모함들을 파견하여 전투가 시작된다.
대처수상이 개전을 선언하자 각료와 우호국들이 교섭과 양보를 종용하지만 수상은 일체의 타협을 배제한다. 기어이 섬을 탈환해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겠다고 나섰다. 대처가 말했다. “흔해빠진 독재자가 여왕의 백성을 지배하고, 부정과 폭력으로 승리를 거두게 버려둘 것인가? 내가 수상인 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대처가 “철의 여인”의 긍지를 드러낸 것은 동맹국인 미국에 대해서였다. 20세기 초, 세계의 패권이 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옮겨지고, 영국은 미국을 지탱하는 주니어 파트너가 되었지만, 대처는 의연한 자세로 미국을 대한 것이다.
당시 포클랜드의 인구는 약 1800만, 목축과 어업 말고는 주목할 만한 산업이 없는 터에, 레이건 미 대통령은 “얼음과 같이 차고 쓸모없는 땅”이라며 화해를 권했다. 그러나 대처는 대통령의 중재를 거부하는 편지를 쓴다. “침략자가 점령하고 있는 데도 전투를 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큰 착오입니다. 그것이 잠재적 긴장지역이나, 작은 나라에 미치는 의미는 지극히 심각한 것입니다. 자유세계가 의지할 수 있는 근본적 원칙을 깨뜨려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국으로 부터 1만 3000킬로 떨어져 있고, 항공모함을 파견하는데도 3주나 소요되는 남대서양에서의 전투에 무려 2만8000의 병력과 100척의 군함을 투입했다. 6월 14일 아르헨티나는 항복했다. 74일간에 걸친 전투에서 아군 255명, 적군 649명의 전사자를 내고. 그만한 손실을 치를 가치가 있었을까? <대처 회고록>은 말한다. “영국의 존재감이 작아짐으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경험은, 1956년 수에즈운하에서의 퇴패였다. 그것은 영국인의 혼에 스며들었다. 세계 속 영국의 지위에 관한 국민의 시선을 왜곡되게 해버렸다.” “전시이건 평시이건 영국은 자국의 이익을 지킬 의지와 능력이 없는 나라로 인정받게 되었다.” “수에즈위기는 영국사회를 갈라놓았고, 국민은 자신감을 잃고 내향적이 되었다. 젊은이들에게는 정치를 멸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을 내향적으로 만들어버린 ‘베트남 증후군’을 따라 ‘수에즈 증후군’이라 일컫게 되었다.”
포트랜드전의 승리에 환호하는 국민에게 수상은 말했다. “우리는 퇴패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머리를 쳐들고 영국인임을 자랑합시다.” 미국의 뉴스위크지(1982년 4월 19일자)는 “The Empire strikes Back”(제국이 역습했다.) 하고 썼고, 취임 1년 반에 23%이던 대처의 지지율은 하루 밤 사이에 그녀를 영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또 하나의 여인 엘리자베스여왕과의 관계는 한 동안 어색하고 서먹서먹했다. 계급이 다를 뿐만 아니라 개성도 달랐기에. 여왕은 대처에 대해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업적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반해버렸다고 했다.
영국의 수상은 매주 한 번, 여왕과 회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여왕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제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나마 영향을 끼칠 여지는 남아 있었다. 회견에는 아무도 동석하지 않고 그 내용은 절대로 드러내서는 안되었다. 대처는 11년에 걸쳐 매주 여왕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둘의 관계는 매스컴의 관심의 중심이었다. 만약 우리나라 정객이라면 몰래 녹음해서 SNS로 흘렸을 법도 하지만.
그녀와 영원한 이별을 고하면서 여왕은, 군주는 평민의 장례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깨는 것으로, 둘 사이의 불화설에 종지부를 찍었다.
enoin34@naver.com
ⓒ 교회연합신문 & www.ecumenicalpres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