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피조 세계에 하나님의 창조 흔적이 새겨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유일하게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자유의지가 같이 하는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형상(첼렘)은 ‘그림자’라는 뜻이 있다. 이런 표현에는 인간 성찰을 위한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지 못할 때 그림자처럼 허무하고 헛된 인생살이가 되고 만다는 경고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선포이자 참된 인간성이 회복해야 함을 알게한다. 여기에 삶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과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면 인간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진지하게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접근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뉴스와 신문을 통하여 전지구적 가난과 전쟁과 분쟁과 갈등의 소식을 듣지만 남의 이야기로 들일 뿐이다. 누군가 해결하겠지? 하고 생각하며 지나간다. 세상에는 남이란 없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본연의 뜻이 여기에 있다.
1890년 말 대기근이 러시아를 덮쳤을 때 여러 지역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을 돕고 자신의 재산을 내놓는 등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삶에서 실천한 작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문학을 통해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고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톨스토이주의’가 잘 드러나는 그의 후기 작품은 동화처럼 쉽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곳곳에 숨겨진 읽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삶의 지혜는 세계적 문호 톨스토이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여기에 평생 빈민 운동에 헌신한 프랑스 성직자 ‘아베 피에르’ 주장처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섬김의 자세를 피력한 신부의 주장을 오늘의 성서의 말씀에서 살피게 한다. 어느날 피에르 신부에게 파산한 기업인이 삶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피에르 신부의 조언을 듣고 싶어서 찾아 왔다. 피에르 신부는 그 날도 노숙인을 찾아다니며 옷과 음식 나누어 주는 사역으로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파산한 기업인이 지속적으로 상담을 요청하자 피에르 신부는 지금은 노숙인을 도와야 하니 ‘지금은 나를 좀 도와주고 당신의 긴박한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이 끝나고 들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고 이해를 구하고 함께 노숙인 돕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파산한 기업인은 피에르 신부를 돕다가 자신의 삶의 긴박했던 문제를 잊어버리게 되고 자살까지 하려했던 극단적인 생각도 멈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파산한 그 기업인은 피에르 신부의 가장 적극적인 조력자로 인생의 새출발을 했던 이야기가 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최고의 가치가 자기에게서 그 가능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 세계경제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전 지구적 가난에 직면하여 있다. 특히 서민경제의 파탄소식이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 우리나라의 서민들의 삶도 생활자금을 대출하여 살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제패턴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 보도를 통하여 듣게 된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제패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빼앗아 간다는 데 있다. 이러한 현실적 삶에 대하여 잠언은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여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이를 하나님의 지혜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그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톨스토이는 지난 2,000년 동안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개인의 도덕적 성장과 정부의 도덕적 타락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믿었다. 그는 소수에 의한 다수의 억압이 전세계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했고, 이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 방법은 인간의 도덕적인 성장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계급과 국가가 없는 상태를 향한 진보적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인 경제결정론이나 폭력적 계급투쟁과는 반대로 모든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것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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