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1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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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해 전인 것 같다. 전국 규모의 목회자 세미나가 한 곳에서 열렸다. 한 연사가 나와 자신의 목회 성향을 말하게 되었는데, 자기 자신은 신도들에게 은사활동을 개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늘의 교회 부흥과 성장이 마치 개개인의 은사활동을 제한하였기 때문이란 말처럼 들렸다. 요한복음에서 저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의 전인(全人)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선포하였다. 요한은 이 예수의 말씀에 주(註)를 붙여서 이르기를, 이 생수는 바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 개개인이 받는 ‘성령’이라 하였다.
현재 한국교회를 점검하여 보면, 신도 개개인이 영적이면서 스마트하게 판단하는 결정 능력이 부재하다. 이는 우리교회의 구조가 예수교회 이전인 모세교회의 구조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교회의 시스템에서는 비전을 보고, 음성을 듣고, 결단하는 이는 한 사람이다. 오로지 그 한사람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과 대면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중세기의 왕권신수설을 빼닮은 꼴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야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임무와 자격을 받기 때문이다. 신도들은 이 특화된 지도자를 따르기만 하면 되기에, 매우 간편하고 쉬운 구조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조는 지도자가 모두 책임을 지는 구조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의 교회는 이미 유대교에서도 문을 닫은 지 오래이다.
주후 70년부터 유대교조차도 이러한 피라미드교회를 신속하게 탈피하였다. 유대교회는 얼마나 스마트하게 발전되고 진화하였던지, 유대인 개개인이 경전을 외우고 실천할 수 있는 제자로 훈련된다. 예전부터 유대교회는 국민 모두가 모세오경을 점하나 틀리질 않게 외워서,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을 지켜왔다. 그 중에서도 랍비 가족은 시편이나 전도서를 더 외워서 매일같이 낭독한다. 이들이 제자를 삼은 국민 개개인은, 언제 어디서나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돌보는 데에 게으르질 않았다. 시문서나 선지서(사 2:3; 미 4:2) 등에서도 ‘율법’과 ‘말씀’을 서로 교차하며 사용하는가 하면, 탈굼에서는 이미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를, ‘말씀을 맞으려고’로 바꿔서 사용한다(출 19:17). 개개인이 경전을 낭독하고 토론하고 학습하면서, 모세가 야훼하나님의 구름기둥(쉐키나) 가운데에 섰던 것처럼, 국민 개개인을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듯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학습과 경건의 효과로 인해서 이들에게 나타나는 외적인 증거들은 허다하다. 노벨상에서부터 과학기술과 경제와 정치에 이르기까지 선두자리를 내어주질 않는다. 저들은 크고 화려한 성전 대신, 한 사람 개개인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는 성소를 수없이 세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개신교는 칼뱅의 종교개혁 500년을 맞이하면서도, 신학이나 시스템이 500년 전보다도 퇴보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왜일까? 이러한 느낌을 받는 것이 나 혼자뿐일까?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은 아직도 신도들에게 지성소를 개방하질 않고 있다. 신도 스스로가 지성소에 나아가고, 신도 스스로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 있고, 신도 개개인의 배에서 성령의 강물이 넘쳐흘러서, 메마른 땅을 적시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두려워서 지성소를 독점한 것이다. 권력과 부와 명예가 독점되었듯이 성령도 독점된 것이다. 모세교회에서 제공하는 달콤함은 얄팍할 뿐이다. 중앙 성전에 사람들이 붐비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나서서 설득력 있는 강연을 하면, 두드러지게 탄탄한 경제력을 갖추게 된다. 이 경제력이 얼마나 위력이 있던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만용마저 일으키게 된다. 지도자가 이런 상황에 최면이 걸리게 되면, 그는 주검을 맞이하기 전에는 결코 그 자리를 벗어나질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하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우리 개개인을 그의 품안으로 초대한 것이다. 이 소중한 초대를 받은 크리스천 개개인이,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담임목회자들은 지성소의 길을 막을 것이 아니라 열어줘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생명을 쏟고, 빛을 비추셨기 때문에, 저는 맏아들이 되시었고, 우리는 주님의 형제들이 된 것이다. 주님이 아버지의 품에 안기시고, 요한이 그 사랑하시는 주님 품에 늘 기대어 있었던 것처럼, 우리 한국교회도 신도들에게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터 주어야 한다. 그래야 신도들 스스로가, 야훼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가운데서, 생수를 강 같이 세상에 흘려보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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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한 예수교회-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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