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도 눈부신 가을 햇살이 슬픔일 줄이야! “본시 평탄했을 마음 아니로다 / 구지 톱질하여 산산 찌저노았다”(김영랑 ‘한줌 흙’)
데자뷔(Dejavu)라 했던가? 시인 박이도는 그의 시 ‘데자뷔’에서 ‘전도서’를 인용한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 이미 한 일이 후에 다시 한지라.” <전도서 1:9> 그래, 지금 보고 있는 슬프디 슬픈 가을 햇살은 결코 처음 보는 풍경은 아닐 지도 모른다. 시인의 말처럼 “결국 나의 시적 사유나 오감을 넘어 육감에 이르기까지의 감관은 시공을 넘나드는 착시현상의 즐거운 낙원”일지도.
6.25라 부르던 전쟁은 끝났다지만, 실감과는 거리가 먼 허탈 속을 해매든던 청춘은 서정주의 ‘가을에’를 읊었다. 막 생겨난 음악 감상실을 드나들며. “쫓겨나는 마당귀”를 두고 입씨름을 벌이면서, 저마다의 공책에 옮겨 적은 시구가 서로 틀렸어도, 감상실에 죽치고 있는 시인들의 해석이 서로 엇갈려도, 그냥 ‘가을에’를 읽었다.
“오게 /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 아는 이, /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 여린 문(門)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
오게 / 저속(低俗)에 항거(抗拒)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 기러기 앞에서 떠나가야 할 / 섧게도 빛나는 외로 운 안행(雁行)- / 이마와 가슴으로 걸어야 하는 / 가을 안행(雁行)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 / 국화(菊花)꽃이 있던 자리, / 올해 또 새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 백로(白鷺)는 상강(霜降)으로 우릴 내리 모네. //
오게 /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듬어진 구름은 / 이제는 양귀비(楊貴妃)의 피비린내 나는 사연으로는 / 우릴 가로막지 않고, / 휘영청한 개벽(開闢)은 또 한번 뒷문(門)으로부터 / 우릴 다지려 /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 일세. //
오게 /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 여린 문(門)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
데자뷔라 했던가. 그날의 청춘이 오늘 다시 ‘가을에’를 읽는다. 이마저 없다면 무엇으로 안주를 할꼬. 그래 그날 들었던 그 재촉소리도 들려온다. “저기 저기 저, 가을 꽃가지 /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 눈이 내리면 어리하리야 /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미당의 시 ‘푸르른 날’ 말이다. 더듬거리다 보면 모두 되살아나 줄지 아는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가지 /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 눈이 내리면 어리하리야 /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어이하리야”를 읊조리던 그리운 벗, 그는 그냥 그리운 사람이 되고 만 터에, <푸르른 날>을 부르다가 목이 멘다. 그라도 곁에 있어준다면. 아니다, 차라리 가길 잘 했지 푸념하면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며 다시 목이 멘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꼬. 지난 해 백내장 수술을 한 탓으로 푸르른 하늘이 더 눈부셔 진 탓일까.
코헤렛의 탄식을 되씹는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도서 1:8-10)
enoin34@naver.com
ⓒ 교회연합신문 & www.ecumenicalpres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