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에 따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서론격인 1장을 경건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세세히 묵상하여 보면, 가장 핵심적인 문장은 1절에서 18절에 기록된 송영일 게다. 이 송영을 오늘의 복음송들 중에 특히 경배송들과 비교하면 비슷한 점이 많다. 요한의 공동체가 기록한 송영은 요한복음서의 시작부터 마지막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짧은 노랫말에 모두 담아낸 것이다. 6-8, 15절에 삽입된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빼고서 다시 읽어보면, 시인의 시상과 노래하는 음률이 그대로 살아난다. 아무리 수만 번 다시 읽어도 이 노랫말은 경이롭기만 하다. 과장법이라는 생각이 들 수는 있어도,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랍비이던 서기관이던 제사장이던 선지자 철학자라도, 심지어 아브라함이나 모세라 할지라도, 그 아무라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품속에 계신 독생자(獨種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계시하시므로, 저들 요한 공동체의 신도들은 드디어 하나님의 영광을 뵈올 수 있었다. 그리고 저들은 고백하며 노래하고 경배한다.
우리가 곡조와 음률과 노랫말을 함께 들음으로서 온몸과 영혼이 전율하며, 이성과 영이 하나가되어 청중들과 함께 공감을 이루는 곡을 말하라고 하면, 베토벤의 교향시 ‘환희’가 아닐까? 이 교향시는 우리 찬송가에도 나와 있긴 하지만, 작시자의 원 뜻을 너무나 손상시켰기에, 교향시 원곡을 들을 때처럼 감동이 일지는 못한다. 그러나 원곡 그대로 듣는다면, 그런 감동과 이 요한 공동체의 송영이 다르질 않을 것이다. 요한교회의 신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거룩한 구원 사역과, 본을 보이심을 서로 나누면서, 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접할 수 있었다. 이 영광을 보고 그대로를 그려내는 화가 렘브란트처럼 저마다 예수를 사람들에게 그려줄 수 있었다. 이 교회의 신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신들이 들려주는, 낭송하는 이 복음을 듣고 믿으면, 아무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리를 얻게 되었음을 의심치 않았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들어가 여러 날 있다가 산 아래로 내려 왔을 때에, 그 얼굴로 반사되어 나오는 거룩한 광영을 차마 백성들에게 보일 수 없어서 수건으로 얼굴을 싸서 숨겼다. 이처럼 주님의 임재 가운데에서 머무르면, 누구라도 자기 자신의 거룩함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이 공동체의 일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권세가, 마치 임금의 양아들이 된 자들보다도 더욱 확실하게, 권력을 거머쥔 실제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고백하며 노래하며 찬양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구약을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시인들과 서기관들과 랍비들에게서 귀가 닳도록 들으며, 입술이 모두 헤어지도록 낭독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신앙의 연속성에서 이제야 역사적 인간 예수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실제로 보았고, 들었고, 아는 바가 된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한 바와 같이, 진리를 안다는 것이 이성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경험하고 누리는 자체를 모두 내포함인만큼, 이 공동체는 예수로 인해서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진리를 아주 풍부하게 경험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진리’란 가시적인 현상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실체’란 뜻이다.
‘계시’란 계시하는 자와 계시된 자가 하나이질 않으면 불가하다. 사람이라야 사람을 보여줄 수 있듯이, 하나님이라야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기에, 인간으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저를 보내신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우리 인간에게 나타내신 것이었다. 요한 교회의 신도들은 저마다 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와 권력에 동참한 것이다.
저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누구든지’ 이다. 결코 집단으로 경험된 것이 아닌, 개개인이 저마다 인격적으로 믿고 경험된 예수였다. 그래서인지 요한 일서에서도 강조하는 것을 보면, 한 집단의 지도자나 그의 지혜에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기름 부어짐으로 인해서 인지된 식별능력이 돋보인다. 요한교회의 생수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에서 솟아나서 흘러나오는 교회이다. 정부도 붕괴되고 국가도 붕괴되고 교회도 붕괴되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나 개개인의 배에서 생수가 샘솟아서 흐르는 교회는 온 세상을 넉넉하게 살려내는 교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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