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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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이 말의 정확한 번역은 “가면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입니다. 빌립이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에 영적 문제로 고민하는 남자를 우연히 만나 성경 공부를 인도하게 되고 그 덕분에 그 남자는 그리스도의 의미에 눈을 뜨게 됩니다.
하박국 2장 2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사는 삶 자체가 교회입니다. 목회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사람과 함께 사는 것, 내가 속해 있는 그곳에 모든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한 예로 마치 마을 이장이 마을 주민을 돕는 것처럼 교회가 처한 그곳에서 함께 살면서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 생산의 방법과 중요성은 한 교회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교회도 교회를 생산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합니다.
교회에 대한 의미 부여에 따라서 바른 신앙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오직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한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처럼 머리와 지체라고 하여 결국 한몸이라는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한국적 유교적 관습에서 검은 양복을 입고 검은 넥타이를 맨 사람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로서의 숙련공으로서 다양한 생활 속에서 삶 그 자체가 목회라는 사실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방향을 가르치는 것이 목사가 아니고, 그 지시함을 받는 것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목사이고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한 존재로서 이 땅에서의 임재가 목회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과장법을 사용하여 위선적 표현이 아니라 그 말 그대로입니다. 그 이유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이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 그 자체인 것입니다. 목회나 전도도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의 이웃집 문을 두드리고 서로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매일 보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돌봐주고 격려해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전도요, 목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주 먼 곳까지 와 있습니다. 교회를 성과 위주로 기업화하려는 목회는 결국 교회가 아닌 기업으로 조건에 의해 타락하게 되어 거기서 또 다른 어려움이 산출된 것입니다. 그 대표가 한기총 집단일 수 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발언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근본적으로 변할 수 없는 똑같은 손짓만 하는 이야기는 교회의 근본적 변화를 말할 수 없도록 모두가 올무에 묶여 있습니다.
최소한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이 그 무서운 올무에서 해방하게 해야 하는 이 시대에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의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통적인 형태와 구조와 종교란 틀 속에 가두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 시대는 모세의 법이 구약종교의 시스템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희생제물이 있어야 하고, 제사장제도가 있어야 하고, 장막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 가지를 모두 완성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드려진 진정하고도 완벽한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장막 자체가 하나님과의 연결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몸 혹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로서 서로와 세상을 향해 사역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교회 건물은 진정한 의미의 교회에 있어서 필수요건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거룩한 장소 개념이 아니라, 오직 거룩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A. D. 200년까지 교회 건물 자체가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교회는 마치 산불처럼 거침없이 퍼지는 현상이었으며 기동성, 유연성, 관계, 겸손, 포용 같은 특성을 보였다고 합니다.
유럽교회들이 교회당의 훼파가 그 거창하고 아름다운 예술적 가치를 가진 성전이라는 무용성을 우리는 뒤늦게 교회 부흥이라는 명분으로 실패한 기독교의 모습을 뒤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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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쉬운 것이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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