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점에서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 선언문」에서 ‘바른 신앙운동’이란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기도 하지만 그 뜻을 우리를 통해 역사 하신다는 중책감을 사명으로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 있는 곳으로 흩어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는 반대로 건물을 세워놓고 “오라”고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교회가 아닌 부류로 만들어 집단주의에 모이게 하는 사단의 방법인 것입니다.오라고 하여서 한 그물에 넣고 자기 재산과 그룹을 만들기 위해 교육하고 훈련합니다. 예수님과 관계없는 그런 사람들로 묶어 가두어 놓고 갖가지의 법을 만들어 붙들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그물이 넘치도록 잡은 것은 어부의 꿈이었으나 성공적으로 이룬 고기를 버려두고 나와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성경적 교회의 개념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바울의 기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있기를 빈다.”라고 했습니다.
‘가라’와 ‘오라’는 매우 다릅니다.
가라는 방법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오라는 멈출 수 있는 시설이나 장치와 법이 필요합니다. 가라가 주님의 말씀이라면 목회학이 필요 없습니다. 모양대로 주먹구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학문적 이론이나 체계나 성공이나 성장이라는 용어가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진정한 교회는 오라는 곳이 아닙니다. 가라고 할 때는 교역자가 무한하게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 신학교의 확장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라고 불러 모으면 교회가 필요 없습니다. 대기업화된 교회의 수장이 된 목사만 있어도 됩니다. 한 기업이 문어발처럼 관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업적 교회는 존재 가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것은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입니다.
영적 현실을 담기 위해서 새 포도주의 필수 요소들은
첫째, 예수님이 보여주신 무조건적인 은혜와 포용을 받고 내면화된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눔이 은혜입니다.
둘째, 하나님 그리고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한 기초이자 핵심 원칙이 사랑입니다.
셋째,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 그리고 사람들끼리의 영적 연합이 코이노니아라고 했습니다.
코이노니아의 개념에서 초대교회는 일상 속에서 이런 영적 진리를 실천하는 모습이 분명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서로 격려하고 가르치고 조언하며 살았던 장면이 사도행전 2장의 삶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슈퍼스타인 목회자와 목회 개념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지체로서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지체가 머리에 붙어 존재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고도로 조직화된 교파의 시스템으로 쉴 새 없이 새로운 시스템으로 분열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기업과 동일한 조직 모델에 따라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한국의 최대의 교회 집합체라는 한기총을 모델로 백일하에 인간의 최고 추한 꼴인 금권을 드러낸 것입니다. 총회도 목사가 모이는 곳마다 돈에 눈이 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명분 있는 거짓과 위선이 ‘하나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하는데, 바른 신앙이라고 강요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처럼 기능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기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교회 즉 지체로서의 솔직함을 위선 하려는 데서 우리와 멀리 떨어진 하나님으로 만들고 천국을 가는 것으로 하나님과 우리와는 만날 수 없는 멀리 떨어진 것으로 말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철저히 거리를 두는 이유가 바로 오늘 교회가 아방궁 같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일로 인간의 목적과 성공에 초점을 두는 기업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귀중한 사실을 하나님은 말해야 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심판과 멸망을 즉석에서 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먼저 예고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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