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1.jpg
 시간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다. 시간은 오로지 직선으로 전진만 할 뿐이다. 개인의 사정에 따라서 잠시 멈추거나 잠깐 뒤로 물려주지를 않는다. 시간의 개념은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진행은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현대 물리이론은 시간과 공간을 시공간 연속체라고 하는 단일한 양으로 통합시키고 있다. 한순간도 쉬지 않는 우주의 순환 운동은 작게는 초 단위부터 시작해서 분 단위, 시간 단위, 한 달, 1년, 10년, 100년.. 점점 분열하면서 영원한 시간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고 생명을 키워간다. 여기에 인생의 삶은 단한번의 삶을 산다. 그리하여 한 번의 삶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그러므로 처음과 나중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 삶은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기에 힘을 다하여서 한 철(계절)과 ‘때’를 맞는다. 그러기에 만물에는 ‘철’을 따라 그 삶을 영위에 간다. 그리하여 만사에는 반드시 ‘때’가 있다. 여기서 전도서3:1-3에 보면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고 하시고 그 다음 말씀 11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성서에서 보면 우주 만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준하여 만물은 시작만이 아니라 끝이며 목표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만물을 보는 종말론적 주장들을 통해 우리는 만물을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스도를 곧 만물의 끝이며 목표이며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마지막 아담으로”(요한계시록1:17, 고전 15:45) 보게 된다. 이렇게 종말론적인 믿음은 미래에 대한 언급을 배제하는 실존론적인 해석과 개인뿐만 아니라 인간 역사와 우주의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성서적이고 전통적인 견해와 신전통주의적 재해석 간의 문제점도 알게 한다.
예컨대 신정통주의 신학은 성서적이고 전통적인 ‘종말론’을 심각한 것으로 그리고 비축자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여 종말론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려하고 역사와 우주가 미래에 완성되리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여기에 실존주의적 신학의 장점은 미래에 대해 전혀 언급 하지 않음으로 이 점에서 과학적 견해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효과적인 점에서 보면 인간 양심의 측면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긴급성은 시간적인 급박성으로 표현되기도 하여 시간의 ‘카이로스’적인 단호함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 종말론의 근본적인 주장은 창조자이며 주님이시고 예수를 통해 창조의 목적을 완전히 드러낸 하나님의 실제로 이러한 목적을 가지며 성취가 목표임을 알게 한다. 이것이 파루시아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게 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에 따르는 삶은 인간 서로간의 의사소통, 따라서 공통적인 삶과 역사적 삶의 필수적인 기본이 됨을 알게 한다. 따라서 육체의 부활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삶이 그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인생과 그 역사의 의미와 그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을 무엇보다도 강조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대결하는 자기의지로 만 삶을 살려고 한다. 이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성이기도 함을 믿음으로 알게 한다.
여기에 따라서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과 용맹한 하나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게 된다. “이사야서 9장6절”에서 보듯이 성경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다가올 메시아, 하나님에 대한 이름은 여러 개가 있다. 야훼, 임마누엘, 등등 백성들이 기다리는 그 속성을 뜻하는 이름들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은 실제 불리는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강생하시고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시어 성체의 모습으로 아니면 우리들 삶 가운데 늘 함께 계시는 구원자 (예수)로서 계신다.
아브라함이 민족들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사야예언자도 그 시대적 열망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하였고 그 이름은 불리기보다 실현되었다. 예수님은 육적인 진짜 성적 교재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고 예수님은 육신을 통해 나셨으나 육신으로 난 것이 아니었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처음과 나중’ 신앙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