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15(토)
 
1.jpg
 욥의 문학에서 ‘전에는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경이로운 문장이 그의 문학 결론 부문에 나타난다. 듣는 것으로만 인지되던 세상에서 시각적인 세계로 까지 진전되어 인식되는 문화는, 세상이 뒤집혀지는 발전을 가져왔다. 섹스피어의 극들이 영국 도시마다 매일 저녁에 공연되었는데, 당시의 시민들은 매일 같이 열리는 극장에 연극을 보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연극 공연을 들으려고 갔다고 한다. 매일 같이 열리는 극장은 3000석에서 5000석 규모였다고 하였는데, 당시 시민들이 한 도시에 10만이 살았다고 하더라도 한 달 정도가 지나면 거의 시민들 중에 한사람 꼴로 섹스피어의 극들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듣기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에는, 거의 시민들 95%가 글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글을 모르긴 하였지만, 저녁마다 극장에 모여 연극을 들으면서 깨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섹스피어의 극은 거의 비극을 다루곤 하였는데, 당시 연극의 테마에는 살인 장면들이 삽입되었는데, 이와 같은 부도덕한 사회적 정치적 정황에 말려들면서, 사람으로서의 선택의 자유와 책임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결단과 행동에는 항상 책임이 뒤따르기에, 책임의식이 없이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무모한 것임을 깨우쳤던 것이다. 이렇게 섹스피어의 연극을 보면서 시민들의 자의식은 진보하며 발전하였다.
이러던 중에 증기기관의 발명과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당시의 영국 국교는 예배당이 아무리 많다한들 그들 도시의 시민들을 모두 수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등장한 인물들이 요한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이다. 이들은 야외에서 텐트를 치고 사람들에게 설교를 시작하였는데, 텐트마저도 저들을 모두 수용하질 못하였으나, 당시 설교가들은 얼마나 발성법이 좋았던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운집하였어도 삼만 명이 설교를 듣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이들의 메마른 가슴을 만져준 설교가들은 군중들이 내어놓는 헌금으로 고아원과 학교를 짓기 시작하였고, 저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였다. 당시 번역되어 인쇄된 성경들을 시민들이 읽을 수 있도록 교회에서 글들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당시 국민(초등)학교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국민에게 글을 깨우치는 계몽교육이 한 세기가 되자 영국시민 50%가 글을 깨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듣기만 하였음에도 책임과 자유를 깨우칠 수 있었던 이 시민들은, 이제 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황족과 귀족에게만 독점되었던 권력과 돈과 명예와 문학이 점차로 시민들에게도 나눠지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백성들과 지식을 공유하기 시작한 이 운동력은 오늘의 한국과 쿠바에 이르기 까지 쓰나미처럼 퍼져나간 것이었다. 복음서에서도 이러한 영적 운동력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제관만 갖고 있던 사죄의 권능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자들 모두에게서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치유하는 일과 귀신을 쫓아내는 일들이 믿는 자들 모두의 사역이 되었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예수가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에서든지,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멈추질 않고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선포되는 현장은 곧 성령의 나타나심의 장소가 되었다.
예수님의 복음이 많은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에 의해서 독점되고 특권자에게 사유화 되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서 독점되질 아니한다. 때로는 황금의 입을 가진 자가 독점하기도 하고, 제왕들과 추기경과 교황들이 독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경이 읽혀지는 곳에서는 운동력과 거대한 변화들이 일어난 것이었다. 예수님은 밤중에 방문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위로부터 나질 아니하면 하나님나라가 보이질 않는다 하였다. 당대에 아무리 석학이라 할지라도 듣기만 하고, 진리 안으로 쑥 들어갈 수 없는 것이, 보이질 않기 때문이었다.
욥은 고난의 과정을 통과 하면서 그의 창조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뵈었다. 우리가 항시 듣던 베토벤의 음악도 어느 시점부터는 그 작곡자가 보이길 시작하고, 그와 더욱 깊은 사귐을 갖게 된다. 지휘자만이 베토벤을 객석으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연주자도 베토벤을 만나게 하여 주고, 영화감독도 시청자들에게 베토벤을 만나게 하여 준다. 이뿐 아니라 오페라나 무용수를 통해서도 우린 그 작품의 진수를 조우한다. 하루에 6시간 넘도록 건반을 두드리다가 갑작스레 작곡가를 만나는 일들은 언제나 있어온 것이다. 이들이 그렇게 감동과 환희를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에는 모두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 주님이 계신 하나님나라야 말로, 그것을 본 자만이 세상에 열어주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성육신한 예수교회-36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