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1.jpg
 
평북 강계 태생
한석지(韓錫祉 1922.1.17~2016.12.27) 목사는 평안북도 강계군 외궈면 이남동 에서 태어났다. 한석지가 태어난 강계지역에는 이미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고 있었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가 태어난 1920년대의 시대적인 배경으로 말하면 조선이 1905년 한일합방이 되었고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것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손아귀로 넘어갔고 일반 백성들은 미래는 고사하고 당장 먹고 살아가는 문제가 급선무였다. 이러한 상황이다보니 제대로 된 교육이나 미래의 꿈을 꾸고 살아갈 처지가 못되었다.
다행히 선교사들이 일찍 전해준 기독교복음을 접하게 된 것이 행운 중의 행운이라 하겠다. 고향에서 부모님들을 도우며 농사일이나 돕고 살아가고 있던 그에겐 한 줄기 소망이 있었다고 한다면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성경을 배우며 예배를 통해 인간의 귀중함과 어슴프레 그래도 미래를 꿈꿀 수 있어서 주일이 기다려졌고, 복음에 대한 호기심이 끓어 올랐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역사를 운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죄악된 인류를 구속하여 천국백성이 되게 한다는 구속의 도리를 깨달은 한석지는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갖은 학정과 수탈로 주민들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 없었다.
나중엔 교회를 향하여서도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해 이곳엔 사람 살 곳이 못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청년 한석지는 한숨만이 나왔다. 이러한 절박한 시기를 지나고 아무도 예상 못한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 살만한 세상이 될까 희망을 가졌으나 해방의 감격도 잠시 이젠 남과 북 사이에 민주냐 공산이냐 하는 이념의 대립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 대두하자 남과 북의 민족지도자들 사이에 암투가 난무하기 시작하였다.

해방 후 자유와 새로운 삶 찾아 월남
청주에서 학업과 신앙생활로 장로장립
총회신학교 졸업 후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
남북통일과 북한선교에 특별한 관심
교단의 후진 양성에 헌신

청년 한석지는 신앙의 자유와 새로운 삶의 전개를 위해서라도 고향을 등지고 월남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잠시 생활터전을 충청북도 청주에 정착해 북쪽에서 마음껏 배우고 싶었으나 생활형편이 여의치 못해 할 수 없었던 학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청주대학 법학과에 입학해 4년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이때 연마한 법률지식은 후에 그가 교단을 위해 노회장으로 혹은 총회임원으로 봉사하면서 법적인 문제를 슬기롭게 짚어내며 법리에 밝은 지도자로 서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61년 대학을 마치고 교회를 섬기며 평신도로 봉사하였고 장로임직을 받고 직장생활을 하던 중 주님께서 부르시는 소명의 음성을 듣고 서울 총회신학교 본과(현 총신대 신학대학원 전신)에 입학 3년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해가 1962년 평양노회에서였다.
청주에서 살고있던 한석지 목사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동암교회로 부임해 함남노회 노회장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청주에 있을 때는 청주시온초등학교 교사로 후엔 교감이 되기도 했다. 교회 안에서 그의 대표적인 봉사사역을 살펴보면, 1955년 청주중앙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고, 1960년 총회신학교 재학 시에는 학우회 회장이 되어 그의 지도력을 나타내기도 하였고, 처음에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에는 평안교회 부목사로 잠시 사역하였고, 1964년 동암교회 위임목사로 청빙 받아 승리로운 목회를 하였다.
그는 북한에서 피난 온 동역자들로 구성된 무지역노회로 불리는 함남노회(咸南老會) 노회장을 다섯 차례나 역임하며 교단을 위하여 봉사하였고, 1972년엔 서북대회(西北大會) 대회장으로, 1980년엔 잠시동안 교단 인재양성 기관인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장 서리로 수고하기도 하였다. 1989년에는 총신신학원 운영이사로 나중엔 부이사장으로 재선되어 총신을 위하여서도 섬김의 손길이 이어졌다.
1991년에는 총회신학원 교단의 수장에 올랐다. 1992년 동암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같은 해 대한예수교장로회 함남노회 공로목사가 되었다.
한석지 목사는 월남한 사람으로 그 어려웠던 정치 사회적인 여건 속에서도 대학교육을 받고서 주의 종이 되기 위하여 총회신학교로 진학, 3년의 정규과정을 마치고 한 교단의 수장이 되었으니 가히 입지전적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도 교단의 후진 양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언제나 조국의 남북통일과 북한선교에 큰 관심을 가진 지도자였다. 이러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1977년에는 미국 애트란타(Atlanta)에 있는 임마누엘신학대학원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D.D)학위를 받았다.
총신대학교 김영우 총장은 그의 하관예배에서 그는 평생 교회와 총회, 총신을 위해 봉사한 어른이었다고 피력하였다.
한석지  목사는 가정적으로도 요셉처럼 자손들이 번성하는 축복을 받기도 했다(크리스챤포커스 2017.1. 3자 뉴스 및 기독신문 2017.1.3(화) p.2 기사 참조).
고인의 장례예배에서 총회장 김선규 목사는 고인은 1979년 대구총회에서 비주류측이 개혁을 빌미로 개혁총회가 분리되어 나가는 틈새에서 교단의 안정을 기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64회 총회장으로써의 리더십을 발휘 교단의 안정에 크게 이받이 하였다고 치하했다.
한석지 목사는 총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총회회관 건립과 총신신대원 양지캠퍼스 조성에도 그의 역량을 기울였다.
그가 남긴 설교 중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의 본문으로 탕자의 회개라는 제목의 설교에 나타난 그의 신앙과 목회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탕자가 자유와 향락을 위해 아버지의 품을 멀리 떠났으나 자연히 비애가 일어났다. 이것은 인류의 가련한 상태이다. 인생은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와야 참 만족과 자유가 있다. 아버지를 떠났던 탕자가 재물과 인격과 자유와 향락을 다 빼앗기고서야 비로서 자기가 있었던 아버지 집의 참 행복을 깨닫고 탕자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와 참 행복과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바로 그 설교는 자신의 신앙고백이었다.
그는 이 설교에서 첫째 부모슬하에 있었던 생활을 언급하면서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기 전에는 아버지의 슬하에서의 안정됨과 행복함을 언급하였다. 둘째, 부모를 떠난 아들의 방탕한 삶의 실태롤 언급하면서 탕자의 생산은 없고 낭비의 삶과 그 결과 궁핍과 배고픔의 모습을 논하고 있다. 그로인해 고통과 저주의 삶으로 전락한 모습을 강조하였다. 셋째, 탕자의 회개를 언급, 아버지의 슬하를 떠난 실존의 모습을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함과 그 자리에서 좌절하지 않고 신앙으로 일어서는 기립의 의지를 회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결단을 언급했다. 넷째, 이러한 결단으로 다시 축복의 생활로 복귀하는 탕자의 모습을 통해 큰 축복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을 결론지었다.
여기에서 한석지 목사의 목회관과 삶의 진솔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그의 신생과 신앙, 나아가서 그의 목회철학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저 에장출판부 2015 서울 p.86-88참조).
필자의 생각으로도 이 설교 속에 그의 목회관과 신앙의 핵심을 읽게하는 철학이 담기었다고 보여진다.
그가 재임했던 제64회 총회 중요 결의안을 보면, ① 주교통신학교를 주교통신대학으로 명칭을 바꾸기로 가결하다. ② 방배동 소재 총회신학교를 불법집단으로 규정하고 수습을 위한 21인의 전권위원을 선출하다. ③ 미주대회 고시는 미주대회에 전권위임해 주기로 결의하다. ④ 부산노회를 3분(부산, 중부산, 울산) 하기로 가결하다. ⑤ 총회산하 전국교회가 연1차씩 선교협력 기금을 내기로 하다(도시교회는 연 2만원, 지방교회는 연 1만원, 미조직교회는 연 5천원).
한석지 목사는 2016년 12월 27일 94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그가 평생소원했던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슬하엔 2남3녀를 두었는데 장남 한철선 박사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 총신신대원 원장으로, 2남 한용선은 호주 시드니에서 사업을 하고 있으며, 혜선, 혜신, 혜옥은 각각 가정을 이루어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69. 제64회 총회장 한석지(韓錫祉) 목사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