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역에서 내려 명동쪽으로 가다가 작은 골목을 끼고 남산을 올라가다 보면 ‘문학의 집’이 있습니다. 길 초입부터 우람한 나무들이 버티고 있어 숲의 기운이 인간을 감싸는 듯한 분위기가 있는 곳이지요. 이곳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정원(옛 중앙정보부)이 있던 자리지요. 그런 서슬퍼렇던 곳이 교통 방송 소방안전본부 등의 건물이 들어서서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였지요. ‘문학의 집’도 옛 중앙정보부장 관사였던 곳을 리모델링하였지요. 경비실은 찻집으로 바뀌었고, 2층으로 된 주택 외관에는 윤동주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의 싯구가 적힌 현수막이 늘어서 있고, 주택 안에는 한용운을 비롯한 시인들의 사진과 현대 시인들의 육필 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곳 1층 홀에서는 문인들의 시낭송이나 문학 강연 등이 주기적으로 열리는데, 좋은시 낭송 문학회에서는 매 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시낭송회를 열고 있지요.
좋은시 낭송 문학회는 공연과 함께 하는 시낭송으로 독자와 친밀감을 가지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문학 단체로 신규호 시인이 회장으로 있으며 회원은 33명입니다. 매월 초대 시인을 초대하여 시낭송을 합니다. 이복래 시인이 ‘봄날은 간다’ 등의 흘러간 노래를 연주하고 나면, 신규호 시인이 인사말을 합니다. “사람의 얼굴 구조는 여타 동물과는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말을 할 수 있도록 턱뼈가 약간 각이 져 있고 성대가 발달되어 있지요.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바로 그 인체 구조의 특성을 제대로 인지하여 과학적으로 글자를 만들어 낸 겁니다. 서울대 언어 연구소에서 사람이 ‘ㄱ’자를 소리낼 때 턱뼈를 X선으로 찍어 봤더니 근육이 영락없이 ‘ㄱ’자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요즘 신문 기사를 보면 언어를 활용할 줄 아는 인간이 더 사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 계모가 자식을 죽이는 것을 봐요. 이건 웬만한 동물도 자기 새끼를 그렇게 하진 않아요. 우리가 시낭송을 꾸준히 하는 것은 인간의 품격을 좀 좋은 방향으로 승화시키자는 거지요. 여러분의 좋은 낭송을 기대하겠습니다.”
S신학대학에서 부총장을 지낸 신규호 시인은 언제나 겸손하게 문단의 이면사를 후배 시인들에게 들려주곤 합니다. 경주에 있는 동리목월문학관을 만들 때 장윤익 교수가 동분서주하였던 일, 1980년대에 “어용 교수 물러가라”는 데모가 한창일 때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개발 방식이 개발도상국에 로드맵이 되는 성과를 강의실에서 꿋꿋이 말한 일 등을, 그는 마치 동화를 구연하듯이 주변 문인들에게 말하곤 하였지요.
그런 느긋한 성격 때문인지, 그는 시낭송 모임을 200회 가까이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과천에 있는 대형 교회에서는 수백 명의 교인들 앞에서 공연을 하였고, 대학로에 있는 연극 공연장을 빌려서 낭송회를 열기도 하였지만, ‘문학의 집’ 공연은 10여 년 이상을 이어온 편입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직업은 다양합니다.
최근 들어 젊은이들 사이에 시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어든 편입니다. K-Pop, K-Drama, K-웹진 등이 성행하다 보니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직도 이 땅에 2만 명 이상의 시에 관심이 있는 동호인들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좋은시 낭송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는 편입니다. 이곳에서 나는 주로 노래를 부르고 시를 낭송하곤 하지요. 노래라고 해 봐야 딱 두 곡,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와 안치환의「위하여」를 부르는 것이 고작이지만, 노래를 부를 때의 그 멋스러운 기분은 나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요.
언제부터인가 대중과 함께 하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독자에게 시를 읽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시낭송의 멋을 독자에게 보임으로써 시의 맛을 느끼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주변에서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습니다. 작가로서의 점잖은 인상이 깨진다며 글이나 똑바로 쓰라는 비판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시는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동인(動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문학의 집’에서 시낭송을 합니다. 이는 인생을 멋있게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인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작가로서의 로망을 꿈꾸고 살아가는 것은 주님이 나의 모습을 귀여워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가지고 계신 주님은 언제나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아 주시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실 겁니다. 주님은 말씀 보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서 지혜를 주시고 멋지고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함께 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며 그 자녀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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