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광주 태생
최기채(崔基蔡 1934. 6. 7~ ) 목사는 광주광역시 남구 임광동 947번지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비교적 순탄한 삶이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일제하여서 성공적인 삶을 예견할 수 없는 장래가 불확실한 식민지 조선에 태어난 신세였으나 다행한 것은 일찍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라 하겠다. 어린시절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대촌 지석초등학교 분교장이었던 신도인 선생님을 통해 성경을 배우며 예배를 드리는 일이었다. 그후 사회활동과 고학하는 시기에는 잠시 동안은 신앙과는 거리가 먼 세상적인 삶을 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군에 입대하여 155미리 포병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때 곽금천이란 친구를 만나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친구가 나를 찾아와 오늘밤에 나를 따라 갈데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그래서 어딜 가는데? 하니까 묻지 말고 꼭 가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어디인데? 알아야 따라가지 …교회에 간다. 야! 이놈아 어제까지만 해도 나에게 도사처럼 불법을 설파한 자네가 벌써 그 사이에 변절을 해 나에게 교회엘 가자고 하느냐? 다 믿어도 풍전세유같은 네가 믿는 종교를 나는 안 믿는다 이놈아 라고 핀잔을 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죽은 사람 원도 풀어 준다는데 친구 소원 하나 안 풀어 주려느냐?라고 하면서, 따라가서 영 취미가 없으면 안 다녀도 좋다. 그러나 나는 내일 의가사(倚家事)제대 특명이 나 군문(軍門)을 떠나는데 사랑하는 친구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다”라며 간청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 친구에게 억지로 끌려간 곳이 강원도 철원군 화지리에 있는 천막교회 수요일 예배에 참석한 것이 잠시 잊었던 주님의 손에 붙들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오늘의 최기채 목사가 되었다고 고백하였다(저방으로 가라 최기채 지음, 생명의말씀사 2004, p.166~167).
군(軍)에서 친구에게 이끌려 예배 참석
담임목사가 지방신학교에 입학시켜 신학공부
‘동명(東明)과 결혼’ 교회에 충성 다짐
노회와 총회서 뛰어난 지도력 보여
시·소설·수필가로 문인 활동
“내가 신학을 지망한 동기는 어떤 사람들처럼 사명감에 불이 붙었다던지 환상을 보았다거나 선교사가 되어 땅끝까지 나가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확신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교회에 몸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본 주위의 친구들과 선배들이 나를 만나면 농담 삼아 최목사 오랫만이여 하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되다보니 나도 모르게 과연 내가 신학을 전공해서 목사가 되어야 하려는가보다 가끔 생각하곤 했는데 결정적인 계가가 왔다. 당시 내가 다니는 교회에 북에서 피난 나온 홍동근(洪東根) 목사가 우리교회에 와서 설교하였는데, 어느날 나를 부르더니 당시 지방신학교였던 광주신하교 야간부에 등록을 시켜주고는 서울로 떠나신 것이었다. 무슨 일에나 한번 빠지면 헤험쳐 나오지 못하는 기질이 나를 신학에 빠져들게 했고 목회의 길로 들도록 꽁꽁 묶이는 일이 되고 말았다. 야간신학을 하면서 이렇게 사명의 길에 들어서 봉사할려면 본격적인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사립 조선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 졸업(문학사 학위)에 이어 대학원(정치학석사) 과정을 마친 후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해 본격적인 신학과 목회를 위해 당시 기라성 같은 신학자 박형룡 박사, 박윤선 박사 등의 문하에서 사명자의 길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에 있어 큰 행운이었고 축복이었다”(저 방으로 가라, 같은책 p.168 참조). 담임목사가 지방신학교에 입학시켜 신학공부
‘동명(東明)과 결혼’ 교회에 충성 다짐
노회와 총회서 뛰어난 지도력 보여
시·소설·수필가로 문인 활동
“지방에 있는 대광교회에서 섬기고 있던 나에게 광주시내에 있는 역사있는 동명교회(東明敎會)의 부름을 받고 부임한 나는 ‘동명과 결혼’이란 시로 표현한 적이 있다. 그 날이 1974년 3월 24일이었다.”
최 목사는 동명교회에 부임하자마자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장기 목회계획으로 1차 5개년 계획을 세워 추진하기 시작하여 교회 성장발전의 기초를 놓았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① 상회에 순종하여 교회부흥을 이룩하자(74년). ② 사랑과 화합으로 하나 되자(75년). ③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교회의 위상을 회복하자(76년), ④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77년), ⑤ 말씀과 기도로 뜨거워지는 교회가 되자(78년)에 이어, 제2차 목회계획을 세웠는데, ① 믿고 배워서 자라자(79년). ② 믿고 자라서 힘을 얻자(80년). ③ 믿고 힘을 얻어 일하자(81년). ④ 믿고 일하여 나누어주자(82년). ⑤ 믿고 나누어 주어 칭찬받자(83년).
그는 계속하여 교회발전을 위해 획기적인 시도를 계획하였다. ① 부목사 제도 신설 ② 당회원 증원과 목사관 신축 ③ 목사관 건축 위해 건축위원회 구성 ④ 교회 개척 전도단 조직으로 교회성장에 박차를 가했다.
계속하여 교인수 증가에 따른 행정의 원활화를 위해 교회총무 제도 신설과 1977년 8월에는 교육관 신축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부임 후 교회는 일취월장 부흥에 힘입어 유년주일학교와 중고등부와 대학부가 성장함에 따라 인재양성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동명장학회(東明奬學會)를 설립하여 대학에 훌륭한 성적으로 입학은 하였으나 경제가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는 교인들의 자녀들을 돕기시작한 것이다. 이에 뒷받침 한다는 취지로 당회장 최기채 목사의 저서 판권(인세)을 장학회에 내놓아 장학재원 조성에 기초를 놓기도 했다.
이럴 즈음 1978년 10월경 동명교회에 속한 총회에 교단 이탈 조짐이 나타나 광주중앙교회 정규오 목사를 추종하여 총회 분규상황에 처했을때 본교회 최기채 목사를 중심으로 대성교회 서문교회 대광교회 중흥교회 한마음교회 남평교회는 교리상의 문제가 아닌 상황에서 인정이나 지역상황을 빙자해 명분없는 총회 이탈을 할 수 없다고 의중을 모았다. 그 중심이 동명교회 최목사가 되었다.
최기채 목사는 이렇게 자기의 목회지 동명교회 지도자로써 뿌리를 내렸을뿐 아니라 교정(敎政) 에도 크게 이받이 하였다. 한국찬송가공회 회장으로, 교단지 기독신문 이사장으로, 총신대학 이사장, 학교법인 광주동명학원 이사장으로 있으며, 전남노회장과 호남협의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미국 리폼드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박사 과정(D.Min)을 이수했고, 카자흐스탄공화국 국립대학교에서 그의 지도력을 인정, 명예문학박사 학위(H.Litt.D)도 수여하였다.
그의 지도력은 본교단 호남지방의 대부로 교단 내외에서 존경받고 있는 신사목사이기도 하다. 최기채 목사에게 또 한 가지 명예가 있다면 문인(文人)이라는 점이다. 목회 일선에서 은퇴한 후에도 시를 쓰고 소설을 집필하고 있으며 목회 현장에서 느낀 바를 수필로 발표하기에 게으르지 않고 있다.
이런 그의 역할을 인정해서인지 1993년 9월 21일부터 24일까지 그가 목회하고 있던 광주동명교회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8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으로 선출되어 그가 사랑하고 뜨겁게 사역했던 교단을 위해 마지막 혼신의 정열을 받쳐 봉사하고 많은 후배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목회 2선에서 교단과 국가의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가 재임했던 제78회 총회의 중요결의안을 살펴 보면, ① 교단발전을 위해 일만교회운동을 재가동 하기로 하다 ③ 학생지도국, 농어촌국, 재무국을 설치하기로 하다 ③ 평신도 성경교육대학을 설립 추진하기로 하다 ④ 70세 정년 범위는 당회, 노회, 총회 산하 모든 목사, 장로, 권사, 집사에 적용하되 신학교수는 65세로 적용한다 ⑤ 브라질에 지방신학교 인준하기로 하다 ⑥ 트레스디아스는 경계단체로 제지하기로 하다 ⑦ 성경공회 설립을 허락하기로 하다 ⑧ 면직된 목사는 강단에 세우지 않기로 하다 ⑨ 표준새번역 성경사용은 금지하고 개역성경을 바른번역으로 출판하도록 하다(100회총회요람, 이승희, 김창수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2016 서울, p.31-32 참조).
최기채 목사는 1974년 3월 24일 부임해 한 교회에서 30년 사역을 영광되게 마치고 2004년 12월 2일 원로목사로 추대되고 은퇴해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슬하에 3남2녀를 두었고 장남 최석 목사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국의 선교사로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있으며 다른 자녀들도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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