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봉사의 현장에서 감사의 삶이 어언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2016년 12월 21일 내 사랑하는 벗, 하늘 시민 이융재 사모의 천국 환송예식을 눈물로 마치고 돌아왔다. 새벽 2시에 잠이 깨어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를 흔들어 내 머리 속에서 대화의 장이 벌어졌다. 잠은 멀리멀리 달아나고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나 내 가슴속 눈 속의 앨범에 한 장의 그림과 같이 또 넣어 두었다. 사랑하는 벗 나의 친구 이융재 사모의 이야기다.
너무 반듯하고, 똑똑하고, 재치 있고, 야무지고, 자신만만하고, 무엇이든지 완벽하여야 하고, 검소하고, 힘든 일이라면 자기가 먼저 하여야 하고, 조금은 촌스럽고, 조금은 똑똑함이 샘도 났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추억 속의 앨범이 되었다.
2016년 11월 7일 월요일 센터에서 만나 다른 때와 같이 수다를 떨며, 깔깔대며 점심을 먹었다. 그러나 융재는 밥을 먹지 않았다. 소화가 되지 않아 밥도 못 먹고, 죽도 소화가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은 꼭 내가 다니는 병원에 가자고 했더니 순순히 따라나섰다. 유** 내과의원이 보통 한두 시간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용하다고 이름이 났다. 기다리는 동안 혈압도 재어보고 이런저런 이야기, 우린 만나기만 하면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다. 얼마를 기다렸나 차례가 되어 들어갔다. 갈비뼈 옆이 아프다고 하니 초음파를 찍자고 한다. 약 1시간 후 판독 결과 당장 CT를 찍어보자고 했고, 2일 만에 담도 담낭암 말기로 림프샘까지 퍼졌다며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야단도 맞았다. 그리고 곧바로 성빈센트병원으로 가, 며칠 만에 가족들의 동의로 1차 항암을 하기로 했다. 딸을 천국으로 보낸 나는 항암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터라 단단히 무장을 하여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항암 다음 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 번은 더 맞아야 한다고 했다. 두 번째는 조금 약하게 또 한 번 싸워야 했다. “이제는 내 인생의 항암은 끝이야, 케모포트(중심정맥관)도 뚫었으니, 나 호스피스로 갈래.”
사실 우리는 지난 15년이란 세월을 호스피스밖에 몰랐다. 어깨 너머 들은 서당개 풍월같이, 자기 병이 어느 정점에 와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손쓸 겨를도 없이 그 나쁜 놈이 도적같이 쳐들어와 자리를 잡아 쫓아낼 방법도 없이 그만 지고 말았다.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또 이렇게 보내야 하나, 융재만 생각하면 눈물이 끝도 없이 나와 울고 또 울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 충격 속에 12월은 악몽! 꿈이라면 깨기라도 하지.
호스피스병원으로 오기 전 나를 자기 집으로 불렀다. 자기가 아끼던 수품을 주면서 받으라고 했다. “이걸 나보고 받으라고,” 나는 울면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빨리 나아서 주면 그때 받을게.” 하면서 둘이 펑펑 울었다. “권사님, 그만 울어. 나는 괜찮아, 만일 내가 치매라서 권사님도 몰라보면 어떻게 해, 또 다른 병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하면 안 되잖아. 암은 로또복권이야. 준비할 시간이 있잖아. 내 나이 72살이 되었는데 살 만큼 살았어. 미련도 후회도 없어. 내가 먼저 천국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어차피 누구나 가는 길 그 분이 부르시면 어쩔 수 없잖아.” 하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얄미운 사람, 정말 미워. 호스피스병원으로 오기까지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자기가 애착을 가지고 봉사하던 이 곳, 호스피스병원으로 결정하고 나니 조금은 편해 보였다.
며칠을 지나 병동에 갇혀있으니 미칠 것 같은 모양이다. 월요일에 원장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최인례 기사, 미자, 융재, 그리고 남희 우리 넷은 의왕호수로 향했다. 융재는 나보고 무슨 말이든지 수다를 떨라고 했다. 자기는 말할 기운이 없으니 무슨 말이든 들려 달라고 했다. 호수에 도착, 물가 평상에 걸터앉아 늘어진 소나무 사이로 햇볕을 쬐며 옛날 노래도 부르고, 찬송도 불렀다. 또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통성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 사모님을 데려가시면 하나님 손해잖아요. 아직은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살려주세요.”라며 엉엉 울었다. 그 후 두 번째 소풍은 광교산, 그리고 바울기도원 낙엽 냄새를 차창 문을 열어 놓고 흠뻑 마셨다.
세 번째 소풍은 12월 15일 목요일. 내가 침대 옆 손을 잡으니 “권사님 내 머리 잘라줘” “응 알았어.” “ 짧게 잘라줘.” “아니 내 마음대로 자를게.” “응 알아서 마음대로 해. 미용사 마음대로니까.”
이것이 마지막 미용이 되었다. 목욕 후 오후 시간 소풍을 가자고 나를 졸랐다. 다시 원장 선생님 허락 후 최인례 기사와 보디가드 유덕준 권사님, 융재 그리고 나, 우리는 왕송호수로, 이것이 마지막 소풍이 될 줄이야.
12월 19일 아침에 가보니 너무 힘들어 보였다. 하루 종일 둘째 아들과 지켜 보았다. 악몽 같은 하루였다. 그날 오후 6시 48분. 인생 고작 70평생에 희로애락을 다투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는 순종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사랑하는 친구(수원샘내교회 최건차 목사님의 사모), 이융재여!
천국에서 편히 쉬소서. 슬픔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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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고 / 김남희(수원기독호스피스 9기 미용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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