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울산 출신
정준모(鄭浚模 1955.3.17~) 목사는 경상남도 울산시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을 고향에서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상장하였다. 그가 태어난 역사적 배경을 잠시 돌이켜보면 1950년 민족통한의 비극 6.25전쟁이 발발해 국토가 분열하고, 휴전으로 전쟁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던 시기에 태어났으니 일제 시대에 비해 행운이라면 그래도 준모 소년에겐 행운이었던 셈이다.
당시 대구와 경북지역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구역으로 확정되어 부산에 이어 대구에도 윌리엄 베어드(William M.Baid 배위량)와 그의 처남 제임스 아담스(Rev. James E.Adams)에 의해 선교지부(Mission station)가 설치되었고, 대구에 이어 안동에도 선교지부가 설치된 후라, 대구는 물론 경북 전역에 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준모 소년이 살고 있던 산촌에도 기독교 복음이 전해졌고, 초등학교와 중학시절을 고향에서 보내며 열심으로 학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시골에 살면서도 이미 상당히 개명(開明)된 사고를 가진 부모님의 덕택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으면서 그의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당시 2년제였던 대구교육대학에 진학, 장차 이 나라를 어깨에 메고 나갈 후진양성의 꿈을 꾸면서 열심으로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의 학업과 인격형성에 미친 것은 신앙이였다. 주의 종이 되겠다는 더 큰 세계적인 비젼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 받아 대구 근교에서 근무하게 되자 내일에 대한 꿈의 실현을 위해 부족한 학문을 보충하기 위하여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해 문학사(文學士) 학위를 받았다. 앞으로 다원화 되어 가는 사회에 교회가 펼쳐나갈 꿈을 꾼 것이다. 이어서 영남대학교 대학원에 진학, ‘학교의 사회적 풍토와 아동의 사회화에 관한 이론적 고찰’이란 논문으로 문학석사(M.A) 학위를 받았고, 이때가 1981년이었다.
이어 총회신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 3년 과정을 마치고 ‘성경 영감교리에 관한 역사적 고찰과 성경적 증거’란 논문으로 문학석사(M.Div), 총신대학교 일반 대학원에 진학 ‘Samuel F.Moor 한말선교사 활동과 사회개혁에 관한 연구’로 신학석사(Th.M) 학위를 취득하였다(1987. 3). 그리고 좀더 시야를 넓히고 선진신학의 조류를 터득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개혁신학대학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선교학석사 과정과 선교학박사 과정을 동시에 이수하였고, 아프리카 남아공의 스텔렌보쉬대학교에서 신학박사(Th.D) 학위 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하여 대구에 있는 계명대학교 대학원에서 실천신학 전공으로 신학박사(Th.D) 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대구 인근 지역에서 준비된 사역자로 활동하던 중 대구시 남구 송현동에 있는 대구성명교회(大邱聖明敎會)로 부터 부름을 받아(1994년 12월 8일 부임) 20년이 넘게 한 교회에서 한 생애를 주님의 사역을 위해 헌신하여 성명교회를 오늘의 대교회로 이끌어 낸 중심인물로 우뚝서게 되었다.
교육대학 졸업한 초등학교 교사 출신
미국과 남아공 등서 유학한 신학자
교회 일꾼들을 생동적이고 활동적인 제자로
청소년 수련원 통해 미래교회 비전 제시
“사회법정 고소자는 소속노회가 면직”결의
미국과 남아공 등서 유학한 신학자
교회 일꾼들을 생동적이고 활동적인 제자로
청소년 수련원 통해 미래교회 비전 제시
“사회법정 고소자는 소속노회가 면직”결의
그의 증언에 의하면 대구 침산제일교회 고등부 수련회 마지막 철야집회에서 강사로부터 바울의 인생관에 관한 설교를 듣고 자신도 바울 사도처럼 주를 위해 살게 해 달라고 서원의 기도를 드렸고, 이후 6년 동안 위의 기록에 나타난 세상학문으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 것이 성직의 길을 준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대구 성명교회30년사, 남문영 편, 코람데오 발행 2001 대구 초판 p.95 참조).
정준모 목사가 유소년 시절을 보냈던 울산은 오늘날엔 자동차 산업과 제조업을 위주로 한 공업단지로 유명하지만, 당시엔 한가한 어촌에 불과했다. 그러나 부산에 일찍 도착한 베어드에 이어 독일계의 호주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왕길지(Rev. George O.Engel) 선교사에 의해 울산지방에는 일찍 기독교복음이 전해진 곳이다.
장로회 사기(史記)에 의하면 1895년(을미년)에 울산 병영교회(兵營敎會)가, 1901년(신축년)엔 전읍교회(錢邑敎會)가 설립되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상 1928년 p.31, 89참조).
청년기에 들어선 정준모 목사가 대형교회로의 성장기초가 마련된 성명교회에 부임 하자마자 그의 포부는 21세기 모델교회로 예수의 제자되어 제자삼자라는 비전을 선포한 것이다.
정목사가 부임하기 직전 사역자는 법통으로 이름난 조정호(曺正縞) 목사였다. 조목사는 경북대학교를 졸업하고 총회신학교 본과(현, 총신대 신학대학원 전신)을 졸업한 노회안에서도 원칙과 정직으로 통하는 법통으로 알려진 인물로, 그가 10년 넘게 내일의 중흥을 꿈꿀 수 있는 신앙적 기초를 잘 다져놓은 교회를 패기에 찬 준비된 젊은 목사 정준모가 바톤을 이어 받아 비약할 수 있었다.
정목사는 성명교회의 경건한 예배와 봉사의 일꾼들을 생동적이고 활동적인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모시켜 복음의 공동체로 생명이 넘치는 교회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서는 제자화 훈련을 급선무로 여겼다.
1995년 1월 10일 위임식을 거행한 후 교회 앞에 제시한 비젼은 ‘감사하는 25년, 꿈꾸는 25년’이란 목회 표어아래 변화·비젼·역사·치유를 목회비젼으로 제시하고, 이 목표달성을 위해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 바로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계획 아래 권찰들을 훈련시켰고, 프리셉트 성경공부반을 개설 전교우들에게 성경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1995년 교회 설립 25주년을 맞이해서는 25주년에 촛점을 맞추고 전교회 기관이 동원되어 백일장, 직분자 좌담회, 역사자료전시, 부서별 찬양대회, 미자립교회 지원 등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개최, 교인들에게 역사의식을 고양시키며 스스로 교인됨의 긍지와 교회사랑은 주님의 은총임을 자각시켰다. 그리고 성경공부 정착화에 힘쓰며 지역사회 발전에 맞추어 새로운 성서(城西)시대를 꿈꾸며 교회 목회비젼으로, 심령부흥회와 청년들의 7대 사랑운동전개 등 미래교회상을 펼쳐나갔다.
따라서 비젼을 향한 헌신의 결과로 21세기 비젼과 대구북부지역에 성서청소년수련원을 마련키로 하고, 택지준비작업에 들어가 기도 중 몇 차례에 걸쳐 청소년수련원 부지가(4026평) 마련되기에 이르렀고, 이곳은 이후 성명교회비전센터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그 사이 1997년 소위 경제위기로 알려진 IMF시기를 맞았으나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잘 극복하고 오늘의 21세기 대구성명교회 글로벌시대를 열게 되었다.
2000년은 성명교회가 30주년을 맞이한 뜻깊은 해였다. 이렇게 교회가 순조롭게 성장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준모 담임목사의 대·내외 활동 영역 또한 확대되었다. 대구기독교방송국에 정기 설교방송과 기독신학대학원 선교학 교수로, 총신대학교와 모교인 대구대학교에도 강사로 출강하게 되었고, 교단지인 기독신문 논설위원 및 교단 장년부 주일 공과집필, 총회세계선교회 이사로, 정책위원으로 대신대학교 교수 및 재단이사로 총회교육부서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지도력을 발휘했다.
2011년 9월 20일 제96회 예장총회에서 부총회장에 당선되고, 이듬해 2012년 9월 17일~21일 사이 그가 시무하던 대구성명교회(비젼센터)에서 개최된 제97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당선되어 수장(首長)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재임했던 제97회기에서 결의된 중요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총회설립 100주년 사업을 계속 추진하기로 하고 종합발전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다. ② 총회임원 선출을 절충형(제비뽑기+직선제)으로 하기로 규칙 개정하다. ③ 총회설립 100주년을 기하여 전면적인 헌법 개정을 위하여 헌법전면 개정위원회를 설치키로 하다. ④ 고 박형룡 박사 기념사업을 추진하기로 하다. ⑤ 총회산하기관의 총회결의 없는 부동산 구입은 불가하며 매년 공인감사기관의 감사결과를 총회에 보고하도록 하다. ⑥ 노회와 총회의 결정사항에 대하여 절차없이 사회법정에 직접 고소하는 자가 패소할 시 소속노회가 면직하도록 하고 노회는 5년간 총대권을 정지하기로 가결하다.
정 목사의 슬하엔 2남1녀의 자녀가 있으며 아들들은 모두가 미주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사명자의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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