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4월 14일 양재 온누리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 4월 월례회 ‘종교개혁의 모토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이해’에서 손봉호 교수가 발제한 ‘오직 성경으로만..’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1. 개혁자들의 “오직 성경으로만”
종교개혁의 핵심은 성경 권위의 회복이었다. “오직 은혜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등 다른 원칙들은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므로 논리적으로는 부차적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천주교가 성경을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성경을 무시하고는 기독교가 성립될 수 없다. 문제는 당시 천주교가 “성경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 외에 교황, 신부, 전통 등 다른 것들이 믿음과 생활의 지침을 주는 권위로 같이 인정되었다. 세례와 성찬 외에도 견진(堅振), 고해(告解), 혼인(婚姻), 신품(神品), 종부(終傅) 등을 성례(sacrament)로 인정한 것이나 교황 무오설, 화체설, 마리아 숭배, 연옥, 성직자 독신제도 같은 것은 성경에 근거할 수 없다. 성경은 라틴어를 아는 성직자들만 읽을 수 있었으므로 평신도는 오직 신부들의 입을 통해서만 성경을 알 수 있었고 따라서 신부들의 권위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잡다한 것들을 다 무시하고 오직 성경만 믿음과 삶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한 것은 그 때 상황으로는 혁명적이고 급진적이었다.
루터가 번역한 신약성경은 1522년에 5000부가 인쇄되었는데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3개월 만에 매진되었으며 1534년에 출판된 독일어 성경전서는 루터가 사망할 때까지 12년 동안 10만 권이 팔렸다 한다. 성경 외에도 종교개혁 초기 10년 간 약 6백만에서 7백만이라는 엄청난 수의 소책자가 인쇄되었고, 그 가운데 1/4이 루터의 저작이었다 한다. 그 시대의 경제상황을 고려할 때 실로 놀라운 매체사건이라 할 수 있다.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종교개혁은 불가능했을 것( (Ohne Buchdruck keine Reformation)이란 말이 있지만, ”종교개혁이 아니었다면 그런 매체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Ohne Reformation kein Medienereignis)이다. 그리고 루터와 칼뱅은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하고 구원을 받으려면 성경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글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당시 통치자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권고함으로 오늘날 일반화 된 보편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오직 성경으로만..”원칙은 성경 해석에도 적용되었다. 성경해석의 기준은 철학이론, 교황의 칙령, 공회의 결정, 신학자의 의견이 아니라 오직 성경 그 자체라야 함을 강조하였다. 즉 성경에 의하여 성경을 해석하자는 것이었다. 개혁자들은 당시 천주교에서 유행했던 우의적 (allegorical) 해석을 비판하고 문자적 의미에 충실할 것을 강조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해석자의 생각이 개입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아우구스티누스 등 교부나 신학자들이 제시한 해석들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의 수도승으로 그의 사상에 심취했고 칼뱅도 그의 기독교강요에 아우구스티누스를 많이 인용하였다. 참조하는 것과 그것을 권위로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최근 독일에 <독일, 곧 루터의 나라> (Christine Eichel, Deutschland, Lutherland)란 책이 발간되어 독일은 주로 루터에 의해서 이뤄진 나라라는 인상을 준다 한다. 독일 뿐 아니다. 전 세계가 종교개혁의 덕을 보고 있다.
종교개혁 때문에 기독교가 지금도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 기본인권, 사회복지, 보편교육, 자연과학 등 현대 사회의 긍정적인 요소들 대부분도 이뤄졌다. 그것은 곧 성경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은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하여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 전 세계 개신교인의 87%가 선진국 혹은 중진국에 살고 있다 한다. 개신교 국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민주주의가 성숙해 있고 경제적으로 단단하다. 성경의 위대함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당시 천주교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라틴어로만 읽어야 하는 것에는 비판적이었지만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자 크게 걱정했다. 누구든지 성경을 읽고 제 마음대로 해석할 것이므로 교회가 사분오열될 것이라 경고했다. 그가 우려했던 바는 실제로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에라스무스처럼 헬라어 성경만 편집하고 성직자들만 성경을 읽었다면 더 큰 부작용이 생겨났을 것이다.
2. 한국교회와 “오직 성경만으로”
(1) 한국 교회는 거의 대부분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을 공식적으로 수용하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복음적이고, 그 덕으로 서양의 많은 교회들과 달리 아직도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는 어떤 교회도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이 중요한 전통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2) 그러나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은 한국 교회에서는 오직 고백으로만, 관념적으로만 존중될 뿐 구체적인 삶에는 그렇게 존중되지 않고 있다. “말과 행동,”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경우에는 그 간격이 지나치게 커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목회자 독제, 목회 세습, 단체장 선거부정 등 성경의 가르침으로 전혀 정당화할 수 없는 일들이 버젓이 자행되고 많은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은 그런 것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성경 불감증에 걸려 있다.
(3) 설교와 성경해석에도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이 무시되고 있다. 비록 중세 시대 천주교의에서만큼 우의적 성경해석이 심각하지는 않지만 한국 교회에는 그와 못지않게 주관적이며 자의적인 해석에 근거한 설교가 많이 이뤄지고 있다. 심이어 성경 주석을 전혀 무시해버리는 설교자도 없지 않다. 2000여 년의 기독교 지성사를 무시하는 오만이며 어리석음이다.
물론 문자적 해석이라 하여 성경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 뜻을 완벽하게 알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은 19세기 슐라이어마하(A. Schleiermacher)에 의하여 도전을 받았고 해석학적 순환 (hermeneutic circle) 같은 방법론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런 도전은 어차피 우리의 성경 해석은 상대적이며 불확실하기 때문에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이 나쁘지 않거나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100% 정확하고 객관적인 이해는 어려더라도 2000여 년간 이뤄진 성경해석을 참고하고 믿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우리의 구원과 순종을 위해서 필요한 가르침은 충분히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스스로 고백하듯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만으로..”의 정신에 좀 더 신실하게 충실하면 한국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상당수가 해결될 것이다. 윤리적 실패도 극복할 수 있고 분열의 문제도 어느 정도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최대 종교로서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 감당해야 할 임무도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고 사회의 존경을 회복해서 복음전파와 선교에도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올바로 기념하는 길은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에 더 충실해지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성경 권위의 회복이었다. “오직 은혜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등 다른 원칙들은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므로 논리적으로는 부차적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천주교가 성경을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성경을 무시하고는 기독교가 성립될 수 없다. 문제는 당시 천주교가 “성경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 외에 교황, 신부, 전통 등 다른 것들이 믿음과 생활의 지침을 주는 권위로 같이 인정되었다. 세례와 성찬 외에도 견진(堅振), 고해(告解), 혼인(婚姻), 신품(神品), 종부(終傅) 등을 성례(sacrament)로 인정한 것이나 교황 무오설, 화체설, 마리아 숭배, 연옥, 성직자 독신제도 같은 것은 성경에 근거할 수 없다. 성경은 라틴어를 아는 성직자들만 읽을 수 있었으므로 평신도는 오직 신부들의 입을 통해서만 성경을 알 수 있었고 따라서 신부들의 권위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잡다한 것들을 다 무시하고 오직 성경만 믿음과 삶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한 것은 그 때 상황으로는 혁명적이고 급진적이었다.
루터가 번역한 신약성경은 1522년에 5000부가 인쇄되었는데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3개월 만에 매진되었으며 1534년에 출판된 독일어 성경전서는 루터가 사망할 때까지 12년 동안 10만 권이 팔렸다 한다. 성경 외에도 종교개혁 초기 10년 간 약 6백만에서 7백만이라는 엄청난 수의 소책자가 인쇄되었고, 그 가운데 1/4이 루터의 저작이었다 한다. 그 시대의 경제상황을 고려할 때 실로 놀라운 매체사건이라 할 수 있다.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종교개혁은 불가능했을 것( (Ohne Buchdruck keine Reformation)이란 말이 있지만, ”종교개혁이 아니었다면 그런 매체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Ohne Reformation kein Medienereignis)이다. 그리고 루터와 칼뱅은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하고 구원을 받으려면 성경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글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당시 통치자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권고함으로 오늘날 일반화 된 보편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오직 성경으로만..”원칙은 성경 해석에도 적용되었다. 성경해석의 기준은 철학이론, 교황의 칙령, 공회의 결정, 신학자의 의견이 아니라 오직 성경 그 자체라야 함을 강조하였다. 즉 성경에 의하여 성경을 해석하자는 것이었다. 개혁자들은 당시 천주교에서 유행했던 우의적 (allegorical) 해석을 비판하고 문자적 의미에 충실할 것을 강조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해석자의 생각이 개입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아우구스티누스 등 교부나 신학자들이 제시한 해석들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의 수도승으로 그의 사상에 심취했고 칼뱅도 그의 기독교강요에 아우구스티누스를 많이 인용하였다. 참조하는 것과 그것을 권위로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최근 독일에 <독일, 곧 루터의 나라> (Christine Eichel, Deutschland, Lutherland)란 책이 발간되어 독일은 주로 루터에 의해서 이뤄진 나라라는 인상을 준다 한다. 독일 뿐 아니다. 전 세계가 종교개혁의 덕을 보고 있다.
종교개혁 때문에 기독교가 지금도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 기본인권, 사회복지, 보편교육, 자연과학 등 현대 사회의 긍정적인 요소들 대부분도 이뤄졌다. 그것은 곧 성경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은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하여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 전 세계 개신교인의 87%가 선진국 혹은 중진국에 살고 있다 한다. 개신교 국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민주주의가 성숙해 있고 경제적으로 단단하다. 성경의 위대함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당시 천주교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라틴어로만 읽어야 하는 것에는 비판적이었지만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자 크게 걱정했다. 누구든지 성경을 읽고 제 마음대로 해석할 것이므로 교회가 사분오열될 것이라 경고했다. 그가 우려했던 바는 실제로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에라스무스처럼 헬라어 성경만 편집하고 성직자들만 성경을 읽었다면 더 큰 부작용이 생겨났을 것이다.
2. 한국교회와 “오직 성경만으로”
(1) 한국 교회는 거의 대부분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을 공식적으로 수용하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복음적이고, 그 덕으로 서양의 많은 교회들과 달리 아직도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는 어떤 교회도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이 중요한 전통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2) 그러나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은 한국 교회에서는 오직 고백으로만, 관념적으로만 존중될 뿐 구체적인 삶에는 그렇게 존중되지 않고 있다. “말과 행동,”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경우에는 그 간격이 지나치게 커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목회자 독제, 목회 세습, 단체장 선거부정 등 성경의 가르침으로 전혀 정당화할 수 없는 일들이 버젓이 자행되고 많은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은 그런 것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성경 불감증에 걸려 있다.
(3) 설교와 성경해석에도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이 무시되고 있다. 비록 중세 시대 천주교의에서만큼 우의적 성경해석이 심각하지는 않지만 한국 교회에는 그와 못지않게 주관적이며 자의적인 해석에 근거한 설교가 많이 이뤄지고 있다. 심이어 성경 주석을 전혀 무시해버리는 설교자도 없지 않다. 2000여 년의 기독교 지성사를 무시하는 오만이며 어리석음이다.
물론 문자적 해석이라 하여 성경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 뜻을 완벽하게 알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은 19세기 슐라이어마하(A. Schleiermacher)에 의하여 도전을 받았고 해석학적 순환 (hermeneutic circle) 같은 방법론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런 도전은 어차피 우리의 성경 해석은 상대적이며 불확실하기 때문에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이 나쁘지 않거나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100% 정확하고 객관적인 이해는 어려더라도 2000여 년간 이뤄진 성경해석을 참고하고 믿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우리의 구원과 순종을 위해서 필요한 가르침은 충분히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스스로 고백하듯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만으로..”의 정신에 좀 더 신실하게 충실하면 한국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상당수가 해결될 것이다. 윤리적 실패도 극복할 수 있고 분열의 문제도 어느 정도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최대 종교로서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 감당해야 할 임무도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고 사회의 존경을 회복해서 복음전파와 선교에도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올바로 기념하는 길은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에 더 충실해지는 것이다.
ⓒ 교회연합신문 & www.ecumenicalpres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