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김제 출생
유인식(兪仁植 1928. 12. 30) 목사는 전북 김제에서 1928년 유영근(兪永根)의 5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불신가정에서 혼자 예수를 믿던 할머니를 따라 예배당에 다녔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판사(判士)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서울법전(法傳)에 들어갔으나 얼마 되지않아 6.25 전쟁의 발발로 남침한 북한 인민군에 쫓겨 죽을 고비를 몇차례 겪은 후 생각지도 못한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전신)로 인도했다.
전쟁 와중에 피난온 대구에서 당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후원하는 성경구락부(聖經具樂部) 교사로 고학을 하면서 신학훈련을 받았고, 1956년 28세에 대한예수교장로회 군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로 장립을 받고 부임한 첫 목회지가 이리북일교회였다. 여기서 8년동안 목회사역을 하면서 노회 서기로 봉사하기도 했다. 1963년 광주 중흥교회로 전임해 16년동안 목회활동을 하면서 교단 인준신학교인 광주신학교(현 광신대학교 전신) 강사로 봉사하였고, 1965년엔 광주시 연합제직회 부회장, 1968년 전남노회 정화동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리고 1974년엔 동서선교훈련원(원장 조동진 목사)에서 운영하는 세계선교대학원을 졸업하였고, 1976년엔 조선대학교 법정대학과 동 대학교 행정대학원(行政大學院)을 수료하였다. 후일 본교단 정·부회장을 역임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총회적으로 규칙부장과 고시부장을 역임하였고, 규칙부장과 전북신학교 교장으로 총신대학교 운영이사로 봉사하기도 했다. 또 총신대 부설 교역자 재교육기관인 목회대학원 원장과 총회유지재단 이사장, 교단지 기독신문 발행인 겸 논설위원을 역임하였고, 호남협의회장과 남북통일기도협의회 총재를 역임하였다.
1978년 6월 17일 중흥교회를 사임하고 김제시 요촌동 김제중앙교회(1910년 7월 7일 설립)로 부임해 1998년 12월 31일 원로목사로 추대 되기까지 신실하고도 성실한 목양일념의 철학을 펼치고 은퇴하였다.
교회사가(敎會史家) 김요나 목사의 평대로 그는 “여주동행(如主同行)을 신조로 평생을 목양일념(牧羊一念)에 불태운 전라도가 배출한 특출한 교회지도자요 행정가였다.”(김제노회 반세기, 김요나 편저, 김제노회 역사 편찬위원회 2002, p.740-741참조, 한국교회인명록 유상일 편, 크리스챤라이프 편 1987, p.128).
김제중앙교회 재임시에 1988년 교회당을 신축하였고, 1989년 예장 제74회 총회에서 부총회장에 당선되고, 이듬해 1990년 9월 18일부터 21일까지 본인이 시무하고 있는 김제중앙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5회 총회에서 교단의 수장(首長)인 총회장에 당선되는 영광을 누렸다.
1991년 11월 5일 새성전 건축 기공예배를 드린 후 연건평 1,049평 규모의 대예배당 헌당예배를 드렸고, 아울러 정종엽 김두환 정창규 박영호 김길수 김형천 황석진 장로장립과, 이효현 송준식 고석만 임채태 서낙원 윤영석 정수곤 한상수 김태환 이종진 안수집사 임직과 구정순 백금옥 안영자 안정순 정창자 강화정 서예순 권사 취임식을 함께 거행하였다.
김제중앙교회는 유인식 목사 부임 20년만에 교세도 3,000여명으로 증가하여 노회 안에서나 총회 안에서도 지도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유인식 목사 시무 중 특기할 사항은 첫째, 1992년 3월 7일 교회 부속 교육기관으로 선교유아원을 설립 교회내외 어린이 대상 간접선교의 장을 펼친 것을 들 수 있고, 둘째 해외선교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1994년 1월 1일 브라질에 박동실 목사를 단독선교사로 파송하였고, 같은해 2월 9일엔 필리핀에 최무림 목사를 선교사로 선정해 파송한 것을 들 수 있다. 셋째 1994년 8월 21일 본교회 선교지인 필리핀에 아세아선교훈련원을 설립하여, 교회 종교법인 평화교회(C.O.P)를 설립하였고, 동시에 아시아 크리스챤아카데미(ASIA CHRISTIAN ACADEMY)를 설립하여 유치원과 국민학교 및 중·고등학교 인가를 취득한 것이다. 이어서 아시아신학대학과 대학원설립과 세계선교대학원(World Theological Semindry)을 본교회에서 설립 운영하기로 결의하고 초대 이사장에 장경현 장로, 서기에 문용언 장로를 임명했다.
전북지역에서 가장 진취적이고 미래적인 선교 프로젝트로 여타 교회들이 눈뜨지 못한 신선한 해외선교전략을 펼친 것이다.(김제노회 반세기, 김요나 편저, 같은책 p.398-399 참조).
이러한 유인식 목사의 목회사역의 성공을 인정해 미국 켈리포니아 주에 있는 크리스챤대학교(Christian University)에서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수여했다(1977년 가을).
유인식 목사의 인생관과 목회철학을 엿볼 수 있는 설교 두 편이 있다. 예장총회 100회 기념 설교집(역대총회장의 증언)에 의하면 누가복음 18장 1-8절 본문으로 “기도응답 비결”이란 제목하의 그의 설교를 보면, 기도응답의 비결에 대하여 ①항상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합니다(눅 18:1-8).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의 예를 들어 쉬지않고 구하는 자에게 또 부르짖는 자에겐 꼭 들어 주신다고 했으며, ②믿음의 기도여야 응답됩니다(마 21:22). 신자들이 기도할 때는 무엇이든 무르짖는 자에겐 꼭 들어주신다고 했으며, ③서원기도를 하나님은 응답하신다(심상 1:10-11). 한나의 기도 예를 들면서 제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헌신하게 하겠다고 서원한 예를 들었다. ④부르짖어 기도해야 응답하신다(시편 81:7). 아삽의 예를 들면서 고난 중에도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⑤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가지고 눈물의 기도를 할 때 응답하신다(사28:1-8). 유명한 히스기야 왕의 예를 들면서 위기 속에서도 눈물로 회개하는 기도를 한 결과 히스기야를 살린 것처럼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눈물로 돌아오는 믿음의 자녀가 되자고 강조하고 있다. ⑥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 받는다(요한 16:24). 성도들은 어떤 문제에 봉착할지라도 눈물로 간절히 간구할 때 응답받는 신앙의 원리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유인식 목사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설교이기도 하고 자기의 목회철학이기도 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두번째 설교인 성경 갈라디아서 6장 14절의 본문을 가지고 <바울의 자랑>이란 제하에, 가문좋고 학벌좋고 로마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문에서 싫어하고 로마에서 죄인취급을 당하면서도, 죄인으로 취급받아 사형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이 자랑할 이유가 무엇인가? 반문하면서 설교를 이어가고 있다.
①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자랑해야 된다. ②사죄와 생명을 주는 십자가였기 때문에 천하인간에 다른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자랑해야 된다. ③십자가는 우리 인간을 사랑한 표증이기 때문에 그를 자랑해야 한다. ④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승리하였다는 표증이기 때문에 그를 자랑해야 한다. ⑤기독교는 부활과 생명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자랑했다. 바울처럼 우리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신자가 되어야겠다고 했다.
유인식 목사 자신의 목회사역의 중심점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의미있는 설교라 하겠다(역대 총회장의 증언, 홍정이 편저, 예장총회출판부 2015초판, p.167-173참조).
마지막으로 그가 재임했던 제75회 총회 주요 결의안을 정리해 보면, ①이단연구가 탁명환씨를 본교단 강단에 세우지 않기로 가결하다. ②목사 장로 집사 권사의 70세 정년제 건은 2년 후부터 시행하기로 하다. ③양인노회를 북강원노회로 명칭 변경을 허락하기로 가결하다. ④은급국을 설치하기로 가결하다.
유인식 목사는 주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은혜롭게 잘 감당한 후 1998년 12월 31일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고 남은 여생을 여유롭게 보내며 후임(김춘식 목사)의 목양 승리를 위해 뒤에서 기도로 지원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1999년 12월 70세 정년은퇴하면서 그가 속한 김제노회로부터 공로목사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사모 박양자 사이에 5명의 자녀가 부모들의 신앙지도 아래 자라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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