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성경에 기록된 신앙개혁의 역사
11. 살신성인의 선지자 예레미야
구별된 소수와 다수의 범죄 집단
죄악적인 성향을 가진 인간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면 그 집단도 역시 죄악적인 성향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그 조상의 시대로부터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듣고 경험하였으나, 그들의 성향과 죄된 습성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구별된 소수의 개인들은 있었지만, 집단적으로는 언제나 누적된 죄악으로 파국을 맞이하는 것이 인류 역사에 나타난 교훈이다. 이렇게 반복된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가련한 죄인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도 날마다 깨어서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인간의 죄악적인 경향과 타락한 상태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언제나 죄를 지적하는 곧은 메시지였고,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과 약점을 파헤쳐 지적하는 선지자의 음성 듣기를 싫어하였고 그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선지자들을 미워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미움을 많이 받았고 죽음의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했던 선지자가 바로 예레미야였다.
예레미야가 전한 개혁의 메시지
타락한 백성들의 죄악적 유형이 늘 대동소이(大同小異)하기 때문에, 시대 시대마다 일어난 선지자들이 외치는 메시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왠지 보다 강렬하고 더욱 열정적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그는 감성이 풍부했던 선지자였던 것 같다. 예레미야는 성전 마당에 서서 성전을 출입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임한 경고를 전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 내용은 주로 이러한 것이었다.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렘 7:2~7).
한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흉악한 죄악과 불법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궤가 있기 때문에 불레셋 사람들과 싸워서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몽상에 불과했다. 법궤까지 빼앗기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와 비슷한 동기에서, 유다의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출입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 ‘착각’에 대하여 경고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마 23:27)다는 말씀이 그들의 실상이었다.
예레미야의 이러한 직설적인 경고의 메시지가 외식하는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심기(心氣)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고 큰 부담을 느끼게 하였다. 특히 제사장들에게는 격렬한 분노를 일으켰으며 심지어는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계획까지 세웠다. 아마, 요즘 시대였더라면, 제사장들은 총회를 소집하여 예레미야를 ‘이단’으로 결의하여 백성들이 예레미야와 상종을 하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의 행태는 거의 유사한 것 같다. 마음이 유약했던 예레미야는 이러한 사람들의 저항과 분노 때문에 크게 상심하기도 하였다.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렘 20:7,10).
그러나 하나님의 보증이 있었다.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여 건짐이니라”(렘 15:20). 그리고 백성들 중에서도 예레미야 선지자의 음성을 듣고 각성하여 회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도움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예레미야는 죽음을 면하고 끝까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주는 현대적 교훈
예레미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성전 마당에서 전했던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이다. 제사장들과 유다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었고 성전을 출입하면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가득하였고 그들의 외형은 위선으로 가리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성전을 출입하면서 드리는 제사 의식 자체가 자신들을 성별하여 이방인으로 둘러싸인 환경 속에서도 거룩한 백성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대단히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하고 유명한 목사를 초빙한 다음, 그 교회에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물론 그 안에도 신실한 성도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당시 유대사회의 형식화되고 왜곡되었던 신앙의 형태가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에 반복되었고, 중세기 암흑의 터널을 지나면서 발생한 개신교에 또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요시야의 개혁이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타락의 행태를 청산하는 것이었다면, 예레미야의 개혁은 각 개인의 심령의 부흥과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개혁이었다. 심령의 부흥과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는 이방 나라의 채찍을 통하여 징계를 받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 수순이었다. 어제나 그제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방법도 언제나 동일한 것이다.
오늘날 이 교회에 니느웨 성에서 일어났던 회개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욘 3:5-8).
오늘날에도 니느웨 왕 같은 양심과 정신을 가지고 백성들과 교회의 죄악을 직시하며 회개를 촉구할 수 있는 영적 지도력의 필요가 절실하다.
11. 살신성인의 선지자 예레미야
요시야가 일으킨 개혁은 가시적(可視的)인 분야였다. 우상을 숭배하는 산당들과 목상(木像)들과 기물들은 파괴되었고 성전은 재건되고 율법책을 펼치긴 하였으나 그 율법책의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심령에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더 나아가 그 기록된 말씀에 순종하며 개인들의 삶이 변화되는 일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요시야의 개혁이 더 발전되어 백성들의 심령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젊은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예레미야였다.
예레미야서 전반에 걸쳐서 감지되는 그의 성격은 수줍어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백성 중에 만연한 죄악에 대하여 심히 괴로워하며 탄식하는 양심적인 선지자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나 책임에 매우 충실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의(義)를 바르게 세우는 일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고 굳게 설 수 있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황폐해가는 유다 백성들의 죄를 깨우치고 그들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감당할 선지자로 예레미야를 선택하셨다. 구별된 소수와 다수의 범죄 집단
죄악적인 성향을 가진 인간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면 그 집단도 역시 죄악적인 성향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그 조상의 시대로부터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듣고 경험하였으나, 그들의 성향과 죄된 습성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구별된 소수의 개인들은 있었지만, 집단적으로는 언제나 누적된 죄악으로 파국을 맞이하는 것이 인류 역사에 나타난 교훈이다. 이렇게 반복된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가련한 죄인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도 날마다 깨어서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인간의 죄악적인 경향과 타락한 상태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언제나 죄를 지적하는 곧은 메시지였고,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과 약점을 파헤쳐 지적하는 선지자의 음성 듣기를 싫어하였고 그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선지자들을 미워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미움을 많이 받았고 죽음의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했던 선지자가 바로 예레미야였다.
예레미야가 전한 개혁의 메시지
타락한 백성들의 죄악적 유형이 늘 대동소이(大同小異)하기 때문에, 시대 시대마다 일어난 선지자들이 외치는 메시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왠지 보다 강렬하고 더욱 열정적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그는 감성이 풍부했던 선지자였던 것 같다. 예레미야는 성전 마당에 서서 성전을 출입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임한 경고를 전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 내용은 주로 이러한 것이었다.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렘 7:2~7).
한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흉악한 죄악과 불법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궤가 있기 때문에 불레셋 사람들과 싸워서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몽상에 불과했다. 법궤까지 빼앗기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와 비슷한 동기에서, 유다의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출입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 ‘착각’에 대하여 경고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마 23:27)다는 말씀이 그들의 실상이었다.
예레미야의 이러한 직설적인 경고의 메시지가 외식하는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심기(心氣)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고 큰 부담을 느끼게 하였다. 특히 제사장들에게는 격렬한 분노를 일으켰으며 심지어는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계획까지 세웠다. 아마, 요즘 시대였더라면, 제사장들은 총회를 소집하여 예레미야를 ‘이단’으로 결의하여 백성들이 예레미야와 상종을 하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의 행태는 거의 유사한 것 같다. 마음이 유약했던 예레미야는 이러한 사람들의 저항과 분노 때문에 크게 상심하기도 하였다.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렘 20:7,10).
그러나 하나님의 보증이 있었다.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여 건짐이니라”(렘 15:20). 그리고 백성들 중에서도 예레미야 선지자의 음성을 듣고 각성하여 회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도움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예레미야는 죽음을 면하고 끝까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주는 현대적 교훈
예레미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성전 마당에서 전했던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이다. 제사장들과 유다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었고 성전을 출입하면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가득하였고 그들의 외형은 위선으로 가리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성전을 출입하면서 드리는 제사 의식 자체가 자신들을 성별하여 이방인으로 둘러싸인 환경 속에서도 거룩한 백성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대단히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하고 유명한 목사를 초빙한 다음, 그 교회에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물론 그 안에도 신실한 성도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당시 유대사회의 형식화되고 왜곡되었던 신앙의 형태가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에 반복되었고, 중세기 암흑의 터널을 지나면서 발생한 개신교에 또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요시야의 개혁이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타락의 행태를 청산하는 것이었다면, 예레미야의 개혁은 각 개인의 심령의 부흥과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개혁이었다. 심령의 부흥과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는 이방 나라의 채찍을 통하여 징계를 받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 수순이었다. 어제나 그제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방법도 언제나 동일한 것이다.
오늘날 이 교회에 니느웨 성에서 일어났던 회개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욘 3:5-8).
오늘날에도 니느웨 왕 같은 양심과 정신을 가지고 백성들과 교회의 죄악을 직시하며 회개를 촉구할 수 있는 영적 지도력의 필요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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