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1-1.jpg
 여호와께서는 이집트에서 400년동안이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하여 시내 산으로 데리고 와서 그들과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 삼으시고, 자신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다. 그리고 그의 백성이 노예가 여호와의 백성답게 살도록 계명을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지도자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는 동안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자 금송아지의 형상을 만들고 그것이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낸 신으로 생각하고 그것에게 절하고, 그것에게 재물을 바치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놀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모습을 보시고 진노하시고 레위인들을 시켜서 삼천명을 진멸하시고, 더 이상 이들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 진노를 달래고 그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간구하며, 용서해주시지 않으시려거든 차라리 자기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 주시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모세에게 그 백성을 데리고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그의 앞서 보내어 그의 길을 인도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과 함께 가는 중에 목이 곧은 이 백성을 멸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가지 못하겠다는 것이다(출 33:1-3). 이 참담한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은 모두 진 밖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장막을 바라보며 회개하고, 모세는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회막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금방 이들을 용서하고 받아 주실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가라고 명하시며 그와 함께 갈 자를  알려주시지 않았음을 불평하며, 그가 여호와 앞에서 은총을 받았다면, 주님의 길을 보여주시고, 주님을 알려주시며, 그가 여호와의 은총을 받은 자 임을 사람들이 알게 해주시고, 그의 백성을 기억해 주시라고 간청한다(출 33:12-13). 모세의 간청을 들으신 여호와께서는 “내가 친히 가겠으며, 너를 편안하게 해 주겠다.”(14)고 응답하신다.
여호와께서 “너를 편안하게 해주겠다”고 주신 말씀은 분명 모세를 달래는 말씀 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가 친히 가겠다”는 말씀은 다음에 이어지는 모세의 응답을 보면 모세의 마음을 충분히 달래는 말씀은 아닌 것 같다. 왜 그런가?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 얼굴이 갈 것이다.”(파나이 에레쿠)라고 말씀하신다. 더욱이 “함께”라는 말은 있지도 않다. 단순히 얼굴이 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영역본들은 거의 “나의 현현이 너와 함께 갈 것이다” (My Presence will go with you.)라고 번역하고 있다. “얼굴이 가다”라는 의미는 얼굴을 보여준다는 말로 하나님의 존재나 나타나심을 감지할  수 있는 천사의 출현이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돌보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모습이나 현상, 혹은 그 장소를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그림자, 발자국, 혹은 현대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명함이나 사진과 같은 의미라고 추측된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동안 간헐적으로 하나님의 그림자나 자취를  보여주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선택하신 것을 알 수 있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간청한다(18). 여기서 주님의 영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때에 “나를 보고는 살 사람이 없으니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20)라고 대답하신다. 앞에서 언급했던 똑같은 말로 “얼굴”이라는 말을 쓰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하시니 그 뜻은 “현현”(Presence)과는 달리 하나님 자신을 지칭하는 말 같다.   “영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카보드”를 번역한 것으로 “무게가 나간다” “빛나고 장엄하다” “영예롭다” 등의 의미를 가진 어휘이다. 얼굴보다는 더 크고 온전하며 장엄하신 하나님 자신을 보여달라는 의미인 것 같다. 따라서 칠십인역(LXX)에서는 “주님 자신을 내게 보여주십시오”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참, 진짜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답변은 여전히 모세가 기대하는 것과는 달랐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원하는 대로 모든 선한 것을 다 보여주시겠다고 대답하시지만, “나를 보고서는 살 사람이 없으니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33:20)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위 틈에 숨겨 두시고, 모세 앞을 지나가심으로 모세가 하나님의 등만을 볼 수 있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가 깨뜨린 돌 판을 대신하여 새로운 돌 판을 깎아 오라고 명하신다. 그가 새 돌판을 깎아 가지고 시내 산에 올라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며 모세의 앞을 지나가셨다.
“여호와이다. 여호와이다. 긍휼히 여기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애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며 수천 대까지 인애를 베풀고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지만 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버지의 죄를 자손 삼 사대까지 벌하는 하나님이다.”(34:6-7)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악을 자손 삼 사대까지 벌하시겠다고 하시니 모세는 다시 엎드려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도록 구한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깨어진 언약을 다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본문은 계속해서 성막 만드는 사건으로 40장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다 만들었을 때, 구름이 회막을 덮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길을 가는 동안에 구름이 성막 위에 떠 오를 때에는 앞으로 나아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떠오른 날 까지 나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모세가 그토록 간절하게 구했던 하나님의 영광은 성막에 임하시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동행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신약을 보면,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는 데, 아버지로부터 오신 유일하신 분의 영광이었으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고 하였다(요 1:14). 여기서 “계신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스케노센”을 쓰고 있는 데 이는 “장막을 폈다”(tabernacled) 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성막으로 임하신 것이며, 바로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으며, 하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인애와 진실이 충만하다고 하셨는 데 그 은혜와 진리가 예수님께 충만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가 그토록 하나님께 보여달라고 간청했던 그 영광이 결국은 예수님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는 죄를 짓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약속의 땅에 갈 수 없게 되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간절히 그들과 동행해주시기를 구하며, 그들에게 보여주시라고 했던 참 하나님은 이제 성막에 임하셨으며, 결국은 예수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우리 가운데 그의 성막을 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고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 안에 영원한 성전을 지으신 것이다. 모세가 구했던 그 영광은 바로 우리 안에 와 계시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보다는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는 약속의 땅을 원했다. 하나님이 없는 축복보다는 하나님 그 자체를 더 원하는 지도자였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60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