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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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으로부터 이야기 실마리를 풀어가야겠다. <부초>란 장편소설로 이름을 얻은 한수산 작가가 2003년 <까마귀>란 이름의 장편소설을 내놓았다. 이를 다룬 언론매체에 그가 80년대 초에 모처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내용이 다루어져 있었다. 나는 한수산 작가를 그저 <부초>의 작가로만 알고 있었고, 그 작품을 통해서 알고 있던 한 작가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수난을 겪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났었다. 그 서정적인 내용의 <부초>란 작품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아마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런데 그의 수난 사건이 “한수산 필화 사건” 또는 “욕망의 거리 필화 사건”이라고도 불린다는 사실을 뒤에 알게 되었다. 여기서 ‘욕망의 거리’란 말은 당시 그의 필화 사건을 일으켰던, 한 작가 자신의 모 신문 연재소설의 이름이었다. <욕망의 거리>는, 신문 연재소설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이,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단순한 통속적 내용의 대중소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소설의 지엽적인 구절들이 당시 정권 실세들의 비위를 건드렸던 모양이다. 그 결과 그가 보안사에 끌려가 일주일 동안 고문을 당했다는 것이다. 다소 어처구니없는 실화가 아닌가.  
그와 비슷한 다른 이야기를 이번(7월 4일)에 한 방송매체를 통해 듣게 되었다. 손석희가 jtbc의 앵커브리핑을 통해 들려준 이야기이다. 고(故) 이문구 작가가 <우리 동네>란 이름의 농촌 연작소설을 발표할 때 일어났던 일이다. 이(李) 작가가 언젠가 모 기관에 불리어 갔었는데, 기관원이 자신(작가)의 작품들 중 ‘박’이란 글자에 동그라미들이 쳐져 있는 것을 보여주며, “왜 박씨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느냐,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냐?” 등 힐난을 해 왔었다고 한다.
다행히 거기서 풀려난 뒤 이(李) 작가는 “아예 모든 소설의 등장인물들에 박씨 성만은 붙이지 않기로 작심했단다. 박씨 성을 지닌 인물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우리 동네> 연작소설들은 그렇게 해서 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문구가 다른 어느 수필 작품 속에서 밝힌 것이라고 하였다. 이문구의 소설 작품들은 더러 읽어본 편이지만, 그의 수필집까지 구해서 읽어보지는 못했던 나는 이렇게 타인의 독서 결과 얻어낸 지식을(아니 정보를) 이제야 알게 된 편이어서 다소 부끄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 정보를(아니 그 사실을) 알고 모르고가 문제가 아니라, 손 앵커가 이 사실을 근래의 블랙리스트 문제와 연관시켜 보여준 그 특이한 해석이었다고 하겠다. 그는 블랙리스트 작성이나 지시의 책임자라고 할 자들에 대한 특검의 조사 또는 공판 중에 나온 말, 곧 피의자들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려놓으려 했다”는 특검 측의 발표에 대해 이는 “블랙리스트 사건의 본질을 모두 담고 있는” 표현이라고 하면서, 이어 또 이렇게 연장 해석했던 것이다. “이문구 소설 속에 박씨가 등장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던 아버지 정부의 문화정책은 대를 이어서 집요하게 계속되고 있었다.”고….  
즉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의 폐쇄적(위협적)인 문화정책이 그의 후대인 박근혜 직전 대통령의 어두운(암흑의) 문화정책으로 간단없이 이어졌던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손 앵커는 이런 닫힌 문화정책의 입안자들을 겨냥하여 이렇게 부연해 평(評)하기도 했다. “예전 그 시대처럼 때리고, 잡아 가두고, 판매를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더 교묘하고 음습한 방법으로 이름들을 지우려고 했던, 탄핵된 정부의 실세들”이라고…. 과거 블랙(암흑) 정치의 실세들이 이제도 그 맥을 이어서 교묘하고 집요하게 블랙(암흑) 문화의 시대를 또 열어가려 하고 있었다는 뜻이겠다. 그러므로 이런 속에서 결국 블랙리스트의 등장은 그 자연스런 산물이라고 보겠다.
요즘 나는 독재자의 생리를 꼭 알고 싶어서라기보다 그 흥미로움 때문에 시간의 여백을 이용해 자크 들라류의 <독재자와 비밀경찰>이란 책을 느린 속도로 며칠째 읽어가고 있다. 절반 분량쯤 읽은 바에 의하면, 독일 사회에 혜성같이 등장한 히틀러가 1930년대 중반에 충복(忠僕)들인 괴링과 히믈러의 지원을 받아가며, 거추장스런 적수들을 어떻게 하나하나 단계적으로(교묘하고도 집요하게) 제거해 나가는가 하는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전개하고 있음이 보인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소위 ‘블랙리스트’ 작성이란 것이 권력을 강화하려는 독재자에게 얼마나 필요불가결한 작업인가 하는 점을 쉽게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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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묻혀선 안될 이들을 위해-임 영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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