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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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이 있지만,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그것을 다룬 걸작. 그것도 코미디 터치가 아니라, 비참한 비극으로 완성한 것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있어서였을까.  
한마디로 <리어왕>은 인간에 대해서 미처 알지 못했었기 때문에 시작된 비극인 동시에 인간을 알게 되었기에 그나마 행복을 알게 되는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리어왕>에서는 “Know+사람”이라는 문체가 자주 등장한다. 1막 1장, 리어왕이 국토를 딸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자, 입에 발린 소리로 아첨을 떨어 국토를 양분해서 받아낸 두 언니와 아무 것도 받지 못한 막내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막내 코델리어가 언니들에게 말한다. “나는 언니들의 정체를 알고 있다오.(I know you what you are.”) 이 대사는 드라마의 프로세스를 예고하는 듯하다.
대조적으로, 코델리어가 사라지자, 언니 리건이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을 알지 못했었지( He hath ever but slenderly known himself.)” 한다. 그러니까 “사람을 안다”는 범위는 타자만이 아니라 자신까지도 포함된다는 진리를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 자매는 그러한 아버지를 이용해서 막내 몫까지 나누어 받았다는 속내를 보여주는 것일까. 이렇게 대사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노라면 작품은 많은 것을 말해 줄 것이다.  
연극이 시작되면서, 여든을 넘긴 늙은이 리어왕이 왕국을 셋으로 나누어 아비를 생각하는 마음이 가장 깊은 녀석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겠다고 선언한다. 첫째와 둘째는 입에 발린 소리로 아첨해서 땅을 차지하지만, 셋째 코델리어는 아비에 대한 마음이 깊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막내의 그런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늙은이는 그녀를 물리쳐 버리는데,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국토의 반씩을 나누어준 바 있는 두 딸에게서 유유자적하는 노후생활을 계획하고 있었던 리어왕은 두 딸 모두에게서 쫓겨나 폭풍우 치는 광야를 헤매는 신세가 되는데, 리어왕을 구하려고 계획을 짜던 충직한 신하 글로스터 백작 또한 의붓아들 에드먼드가 쳐 둔 덫에 걸려 배신자가 되고 곧 두 눈을 잃는다. 리어와 글로스터는 사람을 알지 못했던 탓으로 권력투쟁에서 완패하게 된 것이다.
리어왕과 글로스터 백작은 비참하도록 고통의 밑바닥을 핥는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에게는 지혜와 권력과 책략과 정보망이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협력체제도 완벽해서, 정적 리어왕과 글로스터 백작을 사정없이 몰아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연극들도 그렇지만, <리어왕>이 재미있는 것은, 완패한 두 노인이 비극의 한가운데로 몰리게 되면서야 비로소 참다운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된다는 메시지를 감추어 두었기 때문. 몰락한 지난날의 권력자에게 허락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리어와 글로스터는 굳건히 자신답게 살아가려 안간힘을 다한다. 리어는 실성하고 글로스터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지만... 주인공 리어는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결연히 맞선다. “나는 너희들의 노예가 되었다. 불쌍하고 가냘파 무시당하고 있는 노인일 뿐이다.” 동정을 얻으려는 푸념이 아니다. 자신의 상황을 객관화함으로 억누르고 있는 중압과 맞서려는 투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리어가 실성하게 된 것은 인격적으로 허물어졌기 때문은 아니다. 끝없는 압력을 견디며 스스로를 지키려는 몸부림이요, 자기 의지의 한계를 지키려는 사투였다. 실성했어도 그는 엄연히 리어였다.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리어가 권력을 잃고 보통사람이 되어 갈 때, 또 하나의 리어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쳐다보며 그제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정서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포로가 되어 사랑하는 막내 고델리어와 함께 감옥으로 가고 있는 리어. “두 딸 고넬리와 리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하고 묻는 코델리어에게 대답한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자 감옥으로 가자, 둘이서만. 새장의 새처럼 노래하며 살자구나. 네가 나에게 축복을 구하면, 나는 무릎 꿇고 그대의 용서를 빌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자. 기도하고, 노래하고, 옛이야기를 나누며...”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 14명 중 8명이 죽음을 맞는 비극. 리어왕이 코델리어의 시신을 안고 등장하는 것이 연극의 끝 장면이 된다. “울어라, 울어, 왜 울지 않는가! 목석들인가?...개, 말, 쥐도, 생명을 지니는데, 너는 숨을 멈추었단 말인가? 이제 돌아오지 않는가?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리어도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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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비극 ‘리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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