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 출신
김준규(金俊圭, 1936. 5. 5~) 목사는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다. 청주는 충북의 서부중앙에 위치한 도시로 도청 소재지이며, 한반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옛부터 영남과 호남 선비들이 한양에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한반도의 중원(中原) 역할을 감당해 온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도시 역할을 하고 있어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그가 태어난 1930년대는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난 후로 세계적으로도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시기인지라 교육이나 생업이 열악한 처지여서 앞날을 예견할 수 없고, 자라나고 있는 청소년들에겐 정말 희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기인지라 준규 소년 역시 부모님 밑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고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불운한 시대의 아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준규 소년이 태어나 성장한 청원군 지역에도 일찌기 기독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당도하였다.
주후 1904(甲辰年) 합동공의회 시절(회장 王吉志 선교사)에 이곳 청주지역에 벌써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에 보면, “淸州邑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監理派 宣敎師 徐元甫가 當地에 來하야 傳道함으로 千行均과 女人 金나오미가 밋엇고 至是하야 長老派 宣敎師 閔老雅와 長老 金興京이 當地에 來하야 主의 福音을 協力傳道한 結果로 有望한 靑年中 金源培 方興根 李英均 金在晧 李範後 等이 歸主信敎後로 本邑 南門內에 禮拜堂을 設置하니 敎會가 成立되야 漱次興旺하니라”고 했고, 이 교회가 얼마 안되어 “淸州邑敎會가 漸漱發展되야 南女信徒가 五十餘人에 達하고 金源培 臨終時 遺言과 寄附金百圓이 禮拜堂 建築의 動機가 되야 合心出損함으로 同地 舊韓國淸州營將의 官舍基地를 得하야 廣大한 禮拜堂을 奉獻케 되니 該基地란 昔日 大院君 李昰應이 羅馬敎徒를 虐殺時 無事의 寶血을 流케하던 處所니라, 敎育機關으로 男女學校도 設立하니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청주지역의 선교활동이 상당히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朝鮮예수敎長老會 史記 上 1928, 기독교창문사 p.110, 140).
총회신학교 졸업 후 문학석사 받아
청주중앙교회 부임 후 은퇴하기까지 시무
청주신학교 교수로, 교장으로 임직
CTS TV 이사장 역임
“목사의 불신결혼 주례 금지” 결의
청주중앙교회 부임 후 은퇴하기까지 시무
청주신학교 교수로, 교장으로 임직
CTS TV 이사장 역임
“목사의 불신결혼 주례 금지” 결의
이어서 1907년에 이르러는 당시 청주군 오창면 건지리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淸州郡梧食面 乾地山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勸書 金聖晧와 吳天甫 妻의 傳道로 敎會가 成立하다”(위의 같은 책 p.150~151 참조)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청주에서 유소년 시절과 청년기를 보내면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것은 기독교에 입신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예수를 알게 된 것이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청소년기를 지나며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건국대학교에서 문학사와 문학석사(M.A) 학위를 받고서 총신대학교 본과(현 총신대신학대학원 전신)로 진학,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 밑에서 정통보수신학을 전수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위에 그를 잘 아는 문필가는 그를 가르켜 시인이요 목회자요 설교가로 전형적인 조선선비형이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강단에서도 메모는 가지고 올라갔지만 깔끔하게 복고설교를 잘 했다고 한다.
총회신학교를 졸업한 후엔 고향 청주에 내려와 청주시 주변에 있는 농촌교회를 맡아 사역하던 중 지금의 청주중앙교회의 부름을 받고 목회하기 시작한 날이 1967년 6월 11일 신록이 짙어가는 초여름 본격적인 목회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청주중앙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받고 퇴임하기까지 30년이 넘는 목회사역을 감당하였다. 부임할 당시 청주 중앙교회는 중형교회로 발돋움하기 직전이었다. 70년대에 들어 새마을운동과 산업화 바람으로 인구가 청주시내로 계속 유입되자 교회도 함께 성장해 갈 수 있었다.
부임 이듬해 1968년 4월 23일 위임을 받은 후 그 해 11월 7일 처음으로 신관우 황경우 두 장로 장립과 편봉달 이범철 한정임 민병구 집사 안수식을 필두로 교회의 기초가 다져지기 시작하였고, 1977년 7월 2일 김준규 목사 근속 10주년 기념 및 박창근 장로 근속 20주년, 박용석 장로 근속 13주년 및 최성룡 최영우 조의순 집사 안수식이 있었으며, 교회가 대외적인 사역과 해외선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가 성장함으로 공간이 비좁아 예배당 신축부지로 청주시 사창동 302번지에 919평을 매입, 이듬해 8월 16일 새예배당 신축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1980년 4월 30일 신축예배를 드렸다. 1983년 7월 9일 새성전 입당과 성전봉헌기념임직식을 거행했는데, 조의순 집사 장로장립과 동시에 이봉규 박성길 이영규 김창운 최병락 김형관 손대현 집사 장립식과, 김정순 민광기 권사 취임과, 오학림 국영순 명예권사 추대식을 거행함으로 교회의 구성원들이 점차로 갖추어 가게 되었다.
1987년 7월 13일 비하동 515-16번지의 대지 3731평을 다시 매입, 오늘의 대성전의 꿈을 이루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듬해 10월 10일 온교회가 은혜 가운데 성전기공 감사예배를 드림으로 청주지역 복음화 중앙센터의 꿈을 꾸게 되었고, 노회적으로 지도적인 교회로 우뚝서게 되었다.
그간 담임목사인 김준규 목사는 2005년 7월 2일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대외적으로 총회인준 신학교인 청주신학교 교수로, 교장으로 봉사하며 교단 인재양성에 정성을 기울였다.
김 목사는 꾸준히 자신을 쇄신하며 실력향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 열매로 인도 바라트대학교에서 문학박사(L.D) 학위를 취득해 자기 개발에 힘을 쓰기도 했다. 그를 잘 아는 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성품을 다정다감하면서도 엄격하고 말없는 자기 관리에 철저한 지도자형이라 했다.
총회장 시절엔 기독교 언론기관인 CTS-TV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그의 개인적인 취미생활 중 수석(壽石)과 분재(盆栽)에도 아마추어를 넘어 전문가를 능가할 정도로 식견과 안목을 지니고 있으며, 수중에 지니고 있는 작품 중에는 매우 뛰어난 분재와 수석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이다(2016. 6. 3. 한국교회신문 발행인 여용덕 박사 증언).
김 목사는 남에게 신소리하지 아니하고 자기 일에 충실한 전형적인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춘 지도자이다. 그래서인지 주께서도 그를 어여삐 보셨는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수장(首長)의 자리에 오르게 하셨다. 1996년 9월 17일부터 22일까지 본인이 시무하고 있는 청주중앙교회에서 개최된 예장 제8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된 것이다.
그가 재임했던 제81회 총회 주요결의안을 요약해 보면, ① TV 주일예배 방송을 금지키로 하다. ② 미주대회 및 노회와 법적 행정적 관계를 독립키로 하다. ③ 류광수 다락방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관련된 자를 각 노회별로 시벌키로 하다. ④ 개혁합신측과 교직자 연합집회를 허용하기로 하고 신학교 교수 교류도 허용하기로 가결하다. ⑤ 총회주일은 1월 셋째 주일로 지키기로 하다. ⑥ 목사가 불신자 결혼 주례를 할 수 없다(예배모범 12장 2항). ⑦ 지방신학교 이사장과 교장을 겸직할 수 없다.
김준규 목사와 사모님의 슬하엔 2남1녀가 있으며, 은퇴 후 청주에서 교단과 교회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일로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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