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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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 성도들의 “징계”에 대한 말씀은  항상 우리 신자들이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어쩐지 부담스럽고, 뭔가 마음이 편하지 않다. “징계”라는 말 때문이다. 우리는 죄인이고, 시류를 따라 살다 보면 유혹에 넘어가 실수하고, 그래서 자책하고 좌절하고, 그때마다 징계를 받는다 생각하면 징계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이나 부담감이 없지 않다. “징계”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나무라며 경계함” 혹은 “부정이나 부당한 행위에 대하여 제재를 가함”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나무라며, 경계하고,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본장에 8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헬라어 “파이듀오”(παιδευ’ω)라는 말은 사전에서 “어린 아이들이 성장하도록 인도하고, 지도하고, 훈련하고, 교육하다”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bringing up(기르다), instruct(지시하다), train(훈련하다), educate (교육하다) 라는 말을 쓰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역본에서는 “훈련하다”(discipline)로 번역하고 있다. 반대로 한글 역본에서는 “징계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훈련을 마치 무엇을 잘 못하여 처벌을 받는 것처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파이듀오”라는 말은 “교정하다”(to correct), 혹은 “죄인에 대한 법적 처벌”(legal punishment of transgressor)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어휘의 제1차적 의미는 “훈련하다”이며, “징계”나 “교정”의 의미는 그 사용빈도가 낮다.  뿐만 아니라 본문의 전후 문맥은 “징계”라는 의미보다는 “훈련’ 혹은 “교육”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식을 훈련하듯이 그 사랑하는 자를 하신다고 하는 훈련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죄를 짓고 매를 맞는 처벌을 받드라도 “징계’라는 말보다는 “훈련”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정한 본문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징계라는 말은 번역상 합당하지 않다.
모든 생물은 이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어미로부터 생존을 위한 각종 훈련을 받아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한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훈련, 조직 사회나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기 위한 훈련, 각종의 특별한 전문적인 분야에서 지도자나 책임자가 되기 위한 전문인으로서의 훈련 등등 다양한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특별히 영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아들같이 대우하신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대우하시는 징표가 바로 훈련이다. 따라서 훈련이 없는 자는 참 아들아 아니고 사생자라고 선언하셨다(8). 사생자란 헬라어로 “노도스”(νοθο、V, illegitimate child), 곧 불법적인 자식, 아비가 없는 자식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에 하나님의 그의 백성에 대한 훈련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훈련을 징계라고 한다면 그의 백성을 아들로 여기시고 그의 자녀답게 살도록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이나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해내어 시내 산으로 데리고 와서 이들과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맺고 이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신랑이 되시고,  왕이 되셨다. 그리고 시작하신 일이 바로 40년 동안 광야에서 아들을 훈련시키신 것이다. 400년이나 노예생활을 해왔던 이 백성이 자력으로 해방을 쟁취한 것도 아니고, 자기들은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여 산다고 가정해보면 이들이 과연 살아남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뼛속까지 베인 노예의 근성을 씻어내고 뽑아내기 위하여 광야에서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훈련은 먹는것과 쉬는 것이었다. 먹고 쉬는 일은 어린 아이 때에 부모들이 가정에서 제일 먼서 가르치는 일이다. 노예들은 먹고 쉬는 것이 항상 절실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매일 일정한 시간에 정량의 만나를 먹는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면 일손을 놓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이 40년 동안 여호와께서 주신 율법을 가르쳐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여호와의 도”를 가르쳤다(창 18:19). 선별적으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훈련을 시키셨다.
이러한 훈련은 분명 감당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웃어가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심적으로 낙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3). 그래서 11절에 보면 “모든 훈련이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고통스러워 보인다”고 했다. 아마도 이렇게 하나님의 훈련이 힘든 것이기 때문에 “징계”라는 말을 사용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그럴수록 하나님의 훈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참고, 복종하라고 권면한다(5,7,9). 그러면서 하나님의 훈련과 육신의 부모의 훈련을 비교한다. 육신의 아버지는 자신들의 생각대로 잠깐 동안 훈련하지만 영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도록 훈련하신다고 했다(10).  육신의 아버지는 자식을 훈련을 시키지만 훈련의 목표나 훈련 프로그램이 없다. 자식을 위하기 보다는  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기분에 따라 즉흥적이고 강압적으로 훈련을 한다. 다분히 징계성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영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훈련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도록 훈련하신다. 하나님의 훈련의 목표는 분명하다. 우리가 거룩하고 성별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온갖 죄에 오염되고, 시류를 따라 자기 살길 찾기 위해 눈치만 예민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먹는 훈련, 쉬는 훈련, 그리고 말씀 훈련으로 그의 백성답게 살도록 훈련을 시키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시류를 따라 살지 않고 여호와의 도를 따라 성별되고,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말씀으로 훈련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고, 성별된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는 사람” 이것이 하나님의 훈련의 목표이고 이것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위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3년동안 제자들과 합숙하시며 훈련시키셨다. 말씀으로 말씀의 지도자가 되도록 훈련시키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 (요 15:4)고 명하시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성별된 생활을 하고,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거룩하게 될 때,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와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피흘리기까지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4). 궁극적으로 우리의 훈련은 죄와 싸우기 위하여 힘을 기르는 것이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죄와 더불어 싸우셨는지 우리는 항상 바라보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스스로 훈련하여 성별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먹을 것 가려 먹고, 때를 구별하여 적절하게 쉬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묵상하는 훈련이 우리 성도들을 성별된 삶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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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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