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포럼에 출근하면서 단체 고문직과 회의 참석으로 분주한 시간 가져
박현제 장로(79세, 기감 룻교회)는 아침 일찍 새벽기도회로부터 시작하여 서울 신설동 한국미래포럼을 출근하면서 하루의 일정을 시작한다. 박 장로의 경력이 보여 주는 것과 같이 여러 단체의 고문직을 맡고 있어 항상 분주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지만 지하철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일 것이라고 말한다. 내외환경신문 상임고문, 한국경찰신문 상임고문, 사)대한청소년전통호국무술연맹 상임고문 등을 맡아 자문과 지도를 하고 있다.
교계에서도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부회장, 사)세계한인기독교협의회 부회장 등을 맡아 연합사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의도 정치권에도 중앙당 위원으로 참여하여 새로운 정치 환경 조직에도 열성을 다하고 있어 여러 지인들은 박 장로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팔방으로 종횡무진(縱橫無盡) 바쁘게 사람을 만나고 회의에 참석하는 매우 활달한 성격의 인물이다.
박 장로는 경남 거창 출신으로 1962년 철도청 제1기 공채로 입사하여 19년 간 근무하고 퇴사하기까지 여객전무와 역장 등 중요 직책을 맡아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당시에는 너무나 당당한 전성기였기 때문에 많은 이웃들이 부러워했고 재정적인 여유도 있었다고 한다. 81년 퇴직하여 보다 큰 꿈을 가지고 타이어 수출 사업을 시작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박 장로는 직장생활에 쫓기다 보니 퇴사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이거해 온 후 늦은 나이에 2000년에 룻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고 교계와 정치권에서 새로운 직책을 가지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교단에서는 장로회 지방회회장, 중앙회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지연을 널리 익혀 나갔다. “저는 늦게 장로가 됐지만 항상 믿음으로 살기위해 노력했고, 주님의 은혜 가운데 모든 일에 편안하게 대처하고 처신하게 됐습니다.”
박 장로는 김영삼 정권 시절 부산 중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신앙으로 극복해 왔습니다.”라며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지금도 서울 여의도에 있는 모 정당에 출입하면서 중앙당의 어느 분야에서 정치일선의 조직과 정책을 도우고 있다. “저는 정치권에 출입은 많이 하고 있으나 지금은 일선에 앞장서고 있지는 않고 주로 뒷받침해 주는 역할에 만족하고 있지요.”라며 새로운 정치개편을 염두에 두고 정치안정을 바란다고도 했다.
박 장로는 대한민국 정치의 최선의 길은 “안보가 가장 중요합니다. 안보가 정책의 중심이 돼야 하고, 안보가 정당정책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정치권에 관심이 많은 만큼 많은 전 현직 정치인들과의 교분도 많다고 한다.
박 장로는 한국교회연합운동에 대해서도 “저는 요즘에 보면 전도하는 사람이 안 보입니다. 전도를 열심히 해야 교회가 부흥되고, 전도하는 교회와 단체는 분쟁이나 잡음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 한국교회 지도자 모두는 기도하면서 자신이 전도자로 나서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한편 평신도 운동에 대해서도 “최근 평신도들이 갈급함이 없어요. 사회적인 여건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진실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는 지도자가 너무나 절실합니다.”
박 장로가 존경하는 지도자는 감리교단의 전용재 감독과 박경진 장로라면서 “전 감독은 항상 혁신적으로 일하는 지도자이며, 박 장로는 물질을 가치 있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박 장로는 문광자 권사(77세)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남과 장녀가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부담을 주고 있다면서 늘상 기도의 제목이 되고 있다고 한다. 가정을 위해서 가훈처럼 자녀들에게 ‘믿음으로 살고 신앙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여 나가길’ 원한다고 말한다.
박 장로가 좋아하며 암송하는 성경 구절은 이사야 43장 19절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고, 즐겨 부르는 찬송가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이다.
교계에서도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부회장, 사)세계한인기독교협의회 부회장 등을 맡아 연합사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의도 정치권에도 중앙당 위원으로 참여하여 새로운 정치 환경 조직에도 열성을 다하고 있어 여러 지인들은 박 장로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팔방으로 종횡무진(縱橫無盡) 바쁘게 사람을 만나고 회의에 참석하는 매우 활달한 성격의 인물이다.
박 장로는 경남 거창 출신으로 1962년 철도청 제1기 공채로 입사하여 19년 간 근무하고 퇴사하기까지 여객전무와 역장 등 중요 직책을 맡아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당시에는 너무나 당당한 전성기였기 때문에 많은 이웃들이 부러워했고 재정적인 여유도 있었다고 한다. 81년 퇴직하여 보다 큰 꿈을 가지고 타이어 수출 사업을 시작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박 장로는 직장생활에 쫓기다 보니 퇴사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이거해 온 후 늦은 나이에 2000년에 룻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고 교계와 정치권에서 새로운 직책을 가지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교단에서는 장로회 지방회회장, 중앙회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지연을 널리 익혀 나갔다. “저는 늦게 장로가 됐지만 항상 믿음으로 살기위해 노력했고, 주님의 은혜 가운데 모든 일에 편안하게 대처하고 처신하게 됐습니다.”
박 장로는 김영삼 정권 시절 부산 중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신앙으로 극복해 왔습니다.”라며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지금도 서울 여의도에 있는 모 정당에 출입하면서 중앙당의 어느 분야에서 정치일선의 조직과 정책을 도우고 있다. “저는 정치권에 출입은 많이 하고 있으나 지금은 일선에 앞장서고 있지는 않고 주로 뒷받침해 주는 역할에 만족하고 있지요.”라며 새로운 정치개편을 염두에 두고 정치안정을 바란다고도 했다.
박 장로는 대한민국 정치의 최선의 길은 “안보가 가장 중요합니다. 안보가 정책의 중심이 돼야 하고, 안보가 정당정책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정치권에 관심이 많은 만큼 많은 전 현직 정치인들과의 교분도 많다고 한다.
박 장로는 한국교회연합운동에 대해서도 “저는 요즘에 보면 전도하는 사람이 안 보입니다. 전도를 열심히 해야 교회가 부흥되고, 전도하는 교회와 단체는 분쟁이나 잡음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 한국교회 지도자 모두는 기도하면서 자신이 전도자로 나서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한편 평신도 운동에 대해서도 “최근 평신도들이 갈급함이 없어요. 사회적인 여건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진실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는 지도자가 너무나 절실합니다.”
박 장로가 존경하는 지도자는 감리교단의 전용재 감독과 박경진 장로라면서 “전 감독은 항상 혁신적으로 일하는 지도자이며, 박 장로는 물질을 가치 있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박 장로는 문광자 권사(77세)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남과 장녀가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부담을 주고 있다면서 늘상 기도의 제목이 되고 있다고 한다. 가정을 위해서 가훈처럼 자녀들에게 ‘믿음으로 살고 신앙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여 나가길’ 원한다고 말한다.
박 장로가 좋아하며 암송하는 성경 구절은 이사야 43장 19절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고, 즐겨 부르는 찬송가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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