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
21. 목숨을 걸고 진리를 수호한 루터
루터의 개혁적 영향력은 여러 나라에 확산되었고, 그 당시 가톨릭이 왜곡하여 가르치던 성경의 교리들과 교황을 비롯한 사제들의 부패와 타락과 비리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매우 당혹스러웠고 하루 속히 루터를 제거하는 것이 저들의 급선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새 황제 카알 5세가 즉위하였고, 교황권에서는 새 황제에게 축하의 메시지와 함께 루터의 개혁사업을 막아달라고 특별한 부탁을 하였다. 그것은 빠른 시일 안에 루터를 처형시켜 달라는 당부였다. 새 황제는 그 요청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독일 작센의 매우 학식이 높고 분별력 있는 프리드리히 3세는 선제후(選帝侯,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인단)로서 새 황제를 세우는 일에 크게 공헌한 인물인데, 오히려 루터를 옹호하면서 정당한 절차를 거쳐 그에게 자신을 변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황제에게 조언하였다.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한 황제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루터를 소환하여 제국의회 앞에서 증언할 기회를 부여하였다.
주변의 많은 동료들은 루터가 의회 앞에 나가는 것을 만류하였으나, 루터는 죽음을 무릅쓰고 의회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로마교회의 부패상을 폭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그의 각오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의회가 열리는 “보름스 시내의 악마가 비록 지붕 위의 기왓장처럼 많을지라도 나는 반드시 들어가리라.”((J.H. Merle D’Aubigne, Hostory of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b.7, ch.7). 루터는 이와 같이 목숨을 걸고 진리를 위하여 담대한 믿음을 행사하는 투사였다.
의회 앞에 선 루터의 담대한 증언
루터가 의회에 출두하는 날, 의회로 향하는 모든 길은 로마의 권위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이 용감한 수도사를 보기 위해 열광하는 군중들로 메워졌다. 루터가 의회의 재판관 앞에 서려고 하는 순간, 한 나이 많은 노련한 장군이 그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만일 그대가 하는 일이 바르고, 거기에 대하여 그대가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진하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 하나님께서 그대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D’Aubigne, b.7, ch.8).
루터는 황제의 보좌 바로 앞에 서게 되었고, 온 회의장은 무거운 침묵의 순간이 흘렀다. 드디어 루터에게 질문이 던져졌다. 곁에 쌓아둔 루터의 저서들을 가리키며 그 저서가 루터 자신이 것인지, 그리고 그 저서들의 내용을 취소하겠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루터는 그 책들이 모두 자신의 것임을 시인한 다음, 그 내용들을 취소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저촉되지 않는 대답을 해야 하므로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서 대답할 것이니 잠시 유예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루터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대담하고 비타협적인 성격과는 무엇인가 좀 다른 느낌을 주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고 성령의 감동이었다.
하루의 시간을 얻게 된 루터는 많은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지나고, 이튿날 답변을 위하여 회의장에 나왔다. 고관대작들 앞에 선 루터는 아주 침착하고 겸손한 태도로 차분하게 어제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그 내용들을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자신의 서적들 중, 첫째 부류는 신앙과 선행에 대하여 기록한 것인데 전혀 해로운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취소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진리를 부인하는 것과 같으니 취소할 수 없다. 둘째 부류는, 교황권과 로마교회의 부패와 폐단을 폭로하는 것인데, 이런 저서의 내용들을 취소하거나 그 책들을 폐기하는 것은, 로마교의 악습과 악행을 더욱 조장하여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에 취소할 수 없다. 그리고 셋째 부류의 책들은 현재 자행되고 있는 악폐들을 두둔하고 옹호하는 개인들에 대하여 비판한 것인데, 그 내용이 좀 과격하고 공격적이긴 하지만, 그 내용을 취소할 경우 진리의 원수들이 더 완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취소할 수 없다.
그의 대적들이 가부간에 좀 더 명확한 입장을 요청하였을 때 개혁자 루터는 대답하였다. “성경의 증언과 가장 분명한 논리로서 본인을 설복시킬 수 없는 한, 또한 본인이 인용한 성경 구절에 대하여 본인을 설복시킬 수 없는 한, 본인은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양심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Here I Stand. ‘저의 신조는 성경에 기초한 것입니다’라는 의미). 저는 그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D’Aubigne, b.7, ch.8). 온 회중은 성경에 기초한 그의 확고부동한 태도와 답변에 대하여 경탄해마지 않았다.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절한 황제와 루터의 죽음
로마의 황제 카알 5세는 루터의 답변을 들으면서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 분위기에 압도되어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절하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나는 선조들의 모본을 따르기로 굳게 결심하노라.” 성경에서 벗어난 선조들의 풍습과 부패와 타락과 오류들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결정이었다. 악의 세력에 지배를 받고 있는 주권자들은 온 시대를 통하여 늘 이와 같은 입장을 고수하였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빌라도가 무엇이 정의인지 알면서도 불의의 세력에 예수님을 내어 주지 않았던가.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던 벨릭스 총독과 아그립바 왕의 반응이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행 24:25).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
진리와 정의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분위기와 정서와 여론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오늘날의 종교지도자들이나 정치지도자들도 이와 같은 누(累)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정한 개혁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려면, 권세를 잡은 주권자들이 올바른 정신과 정의감을 가지고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요시야 왕이 율법서를 들고 개혁을 했던 것처럼, 과감하게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세웠던 여호사밧에 의하여 유다 나라의 개혁이 신속히 이루어졌던 것처럼,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지도자들이 솔선하여 정의를 세우고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 개혁의 지름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가 의회에서 증언하는 과정을 통해서 처형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의회 증언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체포되어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는 산성 바르트부르크(Wartburg)로 끌려가 비밀스러운 집에 홀로 머물게 되었는데, 이것은 루터를 보호하려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만들어낸 조치였다.
오랫동안 루터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루터의 적들은 이제 더 이상 루터가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나, 루터는 그 조용한 산성에서 소책자들을 만들어 보급하면서 개혁의 불길을 이어갔고, 특히 그곳에서 그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인들의 신앙에 위대한 공헌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일어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유럽의 여러 다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도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루터는 1546년 그의 만년에 출생지 아이슬레벤으로 만스펠트 백작의 상속분쟁문제를 해결하러 갔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그 해 2월 18일, 63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아 비텐베르크 성교회에 안장되었다.
2002년 미국에서 제작된 루터 영화에 붙여진 “그가 세상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는 제목이 그의 업적을 대변하고 있다.
21. 목숨을 걸고 진리를 수호한 루터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새 황제 카알 5세가 즉위하였고, 교황권에서는 새 황제에게 축하의 메시지와 함께 루터의 개혁사업을 막아달라고 특별한 부탁을 하였다. 그것은 빠른 시일 안에 루터를 처형시켜 달라는 당부였다. 새 황제는 그 요청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독일 작센의 매우 학식이 높고 분별력 있는 프리드리히 3세는 선제후(選帝侯,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인단)로서 새 황제를 세우는 일에 크게 공헌한 인물인데, 오히려 루터를 옹호하면서 정당한 절차를 거쳐 그에게 자신을 변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황제에게 조언하였다.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한 황제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루터를 소환하여 제국의회 앞에서 증언할 기회를 부여하였다.
주변의 많은 동료들은 루터가 의회 앞에 나가는 것을 만류하였으나, 루터는 죽음을 무릅쓰고 의회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로마교회의 부패상을 폭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그의 각오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의회가 열리는 “보름스 시내의 악마가 비록 지붕 위의 기왓장처럼 많을지라도 나는 반드시 들어가리라.”((J.H. Merle D’Aubigne, Hostory of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b.7, ch.7). 루터는 이와 같이 목숨을 걸고 진리를 위하여 담대한 믿음을 행사하는 투사였다.
의회 앞에 선 루터의 담대한 증언
루터가 의회에 출두하는 날, 의회로 향하는 모든 길은 로마의 권위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이 용감한 수도사를 보기 위해 열광하는 군중들로 메워졌다. 루터가 의회의 재판관 앞에 서려고 하는 순간, 한 나이 많은 노련한 장군이 그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만일 그대가 하는 일이 바르고, 거기에 대하여 그대가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진하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 하나님께서 그대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D’Aubigne, b.7, ch.8).
루터는 황제의 보좌 바로 앞에 서게 되었고, 온 회의장은 무거운 침묵의 순간이 흘렀다. 드디어 루터에게 질문이 던져졌다. 곁에 쌓아둔 루터의 저서들을 가리키며 그 저서가 루터 자신이 것인지, 그리고 그 저서들의 내용을 취소하겠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루터는 그 책들이 모두 자신의 것임을 시인한 다음, 그 내용들을 취소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저촉되지 않는 대답을 해야 하므로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서 대답할 것이니 잠시 유예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루터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대담하고 비타협적인 성격과는 무엇인가 좀 다른 느낌을 주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고 성령의 감동이었다.
하루의 시간을 얻게 된 루터는 많은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지나고, 이튿날 답변을 위하여 회의장에 나왔다. 고관대작들 앞에 선 루터는 아주 침착하고 겸손한 태도로 차분하게 어제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그 내용들을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자신의 서적들 중, 첫째 부류는 신앙과 선행에 대하여 기록한 것인데 전혀 해로운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취소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진리를 부인하는 것과 같으니 취소할 수 없다. 둘째 부류는, 교황권과 로마교회의 부패와 폐단을 폭로하는 것인데, 이런 저서의 내용들을 취소하거나 그 책들을 폐기하는 것은, 로마교의 악습과 악행을 더욱 조장하여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에 취소할 수 없다. 그리고 셋째 부류의 책들은 현재 자행되고 있는 악폐들을 두둔하고 옹호하는 개인들에 대하여 비판한 것인데, 그 내용이 좀 과격하고 공격적이긴 하지만, 그 내용을 취소할 경우 진리의 원수들이 더 완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취소할 수 없다.
그의 대적들이 가부간에 좀 더 명확한 입장을 요청하였을 때 개혁자 루터는 대답하였다. “성경의 증언과 가장 분명한 논리로서 본인을 설복시킬 수 없는 한, 또한 본인이 인용한 성경 구절에 대하여 본인을 설복시킬 수 없는 한, 본인은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양심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Here I Stand. ‘저의 신조는 성경에 기초한 것입니다’라는 의미). 저는 그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D’Aubigne, b.7, ch.8). 온 회중은 성경에 기초한 그의 확고부동한 태도와 답변에 대하여 경탄해마지 않았다.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절한 황제와 루터의 죽음
로마의 황제 카알 5세는 루터의 답변을 들으면서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 분위기에 압도되어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절하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나는 선조들의 모본을 따르기로 굳게 결심하노라.” 성경에서 벗어난 선조들의 풍습과 부패와 타락과 오류들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결정이었다. 악의 세력에 지배를 받고 있는 주권자들은 온 시대를 통하여 늘 이와 같은 입장을 고수하였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빌라도가 무엇이 정의인지 알면서도 불의의 세력에 예수님을 내어 주지 않았던가.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던 벨릭스 총독과 아그립바 왕의 반응이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행 24:25).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
진리와 정의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분위기와 정서와 여론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오늘날의 종교지도자들이나 정치지도자들도 이와 같은 누(累)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정한 개혁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려면, 권세를 잡은 주권자들이 올바른 정신과 정의감을 가지고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요시야 왕이 율법서를 들고 개혁을 했던 것처럼, 과감하게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세웠던 여호사밧에 의하여 유다 나라의 개혁이 신속히 이루어졌던 것처럼,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지도자들이 솔선하여 정의를 세우고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 개혁의 지름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가 의회에서 증언하는 과정을 통해서 처형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의회 증언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체포되어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는 산성 바르트부르크(Wartburg)로 끌려가 비밀스러운 집에 홀로 머물게 되었는데, 이것은 루터를 보호하려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만들어낸 조치였다.
오랫동안 루터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루터의 적들은 이제 더 이상 루터가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나, 루터는 그 조용한 산성에서 소책자들을 만들어 보급하면서 개혁의 불길을 이어갔고, 특히 그곳에서 그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인들의 신앙에 위대한 공헌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일어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유럽의 여러 다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도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루터는 1546년 그의 만년에 출생지 아이슬레벤으로 만스펠트 백작의 상속분쟁문제를 해결하러 갔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그 해 2월 18일, 63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아 비텐베르크 성교회에 안장되었다.
2002년 미국에서 제작된 루터 영화에 붙여진 “그가 세상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는 제목이 그의 업적을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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