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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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이리>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이고, <한 켤레의 신발>은 반 고호의  그림.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두 작품이 겹쳐지는 환상을 맛본 것이다. 나이 탓인가 생각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게 이름 지어 준 주인공 하리 할러(Harry Haller)는 사색하는 인간으로 객관적 시야와 풍부한 식견을 갖춘 인물. 그런 그에게는 이리의 성질도 도사리고 있었다.
알고 지내던 한 교수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벽에 걸려 있는 괴테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존경하고 있는 괴테와는 전혀 달리 속물적인 초상이었다. 식사 중에 나눈 대화도 그랬다. 교수가 한 저널리스트의 논문을 두고 노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냈다. 반전사상은 조국에 대한 반역이라고 몰아세웠다. 비위를 맞추던 할라가 마침내 이리의 본성을 드러낸다. 그 글을 쓴 것은 자신이라고 내뱉고 자리를 나와 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자신이 싫어진 할러는 자살을 생각한다. 밤늦도록 거리를 떠돌던 할러가 술집에서 아름다운 창부 헤르미네와 만나게 된다. 그녀의 권에 따라 댄스를 배우게 되고 여자 친구도 소개받는다. 헤르미네가 말한다. 인간은 정신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야 한다고. 그것은 이리의 성질을 버리고 시민적 성질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소개해준 친구 파블로는 현실 세계에서 진실한 나라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유머가 필요하다고 귀띔해준다. 요긴한 것이 아니라면 유머로 흘러버리면 된다는 것. 유머란 대상을 부정하면서도 긍정하는 것, 일정한 거리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이상적인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 이상이 <황야의 이리>의 줄거리라면 줄거리.
처음 <황야의 이리>를 읽은 것은 50여 년 전 30대 중반이었다. 그때만 해도 50대는 미루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노년이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황야의 이리>는 전적인 공감을 얻을 수 없었던 것 같다. 훗날 50대가 되면 다시 읽으리라 다짐했다. 50년이 지나고 80대 중반이 되어서야 <황야의 이리>를 다시 읽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주인공과 꽤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책 페이지 공백에서 어른거리는 그림 하나를 눈치채게 된 것은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잠시 책을 엎어두고 머리를 식히며 눈을 감았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림, 그것은 영락없이 반 고호의 <한 켤레의 신발>(1887) 그것이었다. 사이버를  뒤져 그림을 찾아냈다. 영락없이 환상으로 본 그 그림이었다.
고흐가 화가가 되기로 작정하고 뒹굴던 아버지 집을 떠나 파리에서 화상을 하는 아우 테오의 신세를 지게 된 것은 1886년 27세 때였다. 목사가 되려다 좌절한 고흐는 농민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당시로써는 상당히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이전 네덜란드에 있을 때도 <감자를 먹는 사람들>과 같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었다.
당시는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화상을 그리기 이전까지 화가들은 자아와 세계 사이에서 두드러진 대립 관계를 느끼지는 않았다. 조화롭고 안정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신의 뜻에 순종하면 그만이었으니.  
그러니까 네덜란드에서는 신앙인 고흐와 화가 고흐 사이에도 갈등이 끼어들지 않았다. 신앙인으로서는 좌절을 맛본 터였으나, 이제 예술가로서의 자신과 전도자로서의 자신을 양립하면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농민화가가 되려 했던 것도 그와 같은 생각에서였을 터이다.
그러던 그가 파리에서 자화상이란 것을 그리게 된다. 그런 일련의 작업 중에 태어난 작품이 <한 켤레의 신발>이다. 고갱의 말에 따르면, 고흐가 아를르의 “노란 집”에 살고 있을 때, 한 켤레의 낡은 신발이 벽에 걸려있었는데, 왜 하고 묻는 고갱의 물음에 대한 고흐의 대답은 대강 아래와 같았다.
목사 되기를 포기한 고흐가 화가가 되겠다고 나서기 전, 탄광에서 전도 활동을 하고 있을 무렵, 탄광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중상을 입은 갱부 하나를 간호하고 있었는데 거의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가 살아난 것이다. 그 사나이에게서 고흐는 부활한 예수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 “이것은 당시 힘들었던 나날을 견디며 부활을 만났을 때, 신었던 신발”이라고 고흐가 말했다는 것.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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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이리’와 ‘한 켤레의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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