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그의 비극들 중에서 가장 짧은 작품.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그 분량이 대략 3분의 2 밖에 되지 않는다. 또 셰익스피어는 끝내 <맥베스>가 책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호사가들의 추측은 그럴 듯한 것들만 해도 꽤 많다. 설득력이 있는 것을 고르라면 검열당국의 삭제 설을 들고 싶다. 당시에도, 아니 당시에는, 상연하기 전에 텍스트를 당국에 제출해서 검열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맥베스>는 그 때에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다는 설 말이다. <맥베스>의 무대는 11세기의 스코틀랜드.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말하고 싶어 한 것은 11세기의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16세기 잉글랜드였으니. 헨리 8세에서 이어지는 잉글랜드의 공포정치를 비판적인 안목으로 그리고 싶었으리라. 혹은 가톨릭신자로서 프로테스탄트가 지배하는 사회를 살지 않으면 아니 되는 작자의 불만도 내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무대에서 국왕을 살해하는 따위의 연기는 할 수 없었기에, 노련한 셰익스피어는 맥베스가 국왕을 살해하는 장면을 무대에 올려놓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관객들로 하여금 칼을 들어 왕을 살해하는 잔혹한 장면을 보는 것 보다 더 짜릿한 스릴을 맛보게 한다. 왕을 살해하기 전과 후에 주인공 맥베스를 휘어잡고 있는 공포감을 과장하는 연출로 법규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관중으로 하여금 그 이상의 긴박감과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왕을 죽인 맥베스가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해하는 연기를 통해서는 관중으로 하여금 주인공의 심정을 공감하게도 한다.
이후 맥베스는 여러 차례 살인을 저지른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는 <맥베스> 이전에도 주인공이 살인하는 장면이 적잖이 연출되고 있다. 햄릿은 덴마크 왕 클로디어스를 죽였고, 오셀로는 아내 데스데모나의 목을 졸랐다. 그러나 맥베스의 살인은 그들의 살인과 질적으로 다르다. 햄릿은 아버지의 복수라는 정서적 정당성을 내비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의 살인은 의도된 것이기 보다는 검술시합을 이용해서 자신을 살해하려드는 음모가 뒤집혀서 발생한 우발적 살인이었다. 또 오셀로가 아내를 살해한 것은 한 사나이의 질투가 낳은 결과였다.
그러나 맥베스가 덩컨 왕을 살해한 것은 누가 봐도 계획적인 범죄일 뿐만 아니라 반역행위이다. 살인은 또 다른 살인을 부른다 했던가. 이어지는 뱅코와 맥더프 부인, 그리고 그 아들들이 살해된 책임은 전적으로 맥베스의 몫이다. 그럼에도 <맥베스>의 관객들은 주인공 맥베스를 동정하게 된다.
<맥베스>는 마녀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관객들이 등장인물의 비극적인 행위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악마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러나 알고 보면 악마의 예언은 악마다운 궤변에 불과하다.
“고운 건 더럽고 더러운 건 곱다.”(1막 1장)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내뱉은 악마의 암시는 충신 맥베스로 하여금 너무나 쉽게 역적으로 돌아서게 한다. “고운 것은 더럽고 더러운 것은 곱다”니.
“모순어법(oxymoron) “은 그리스어 oxys(날카롭다)와 mōros(어리석다)를 합성한 단어로 양립할 수 없는 말을 이어붙이는 수사법을 말한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여러 곳에서 모순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맥베스의 첫 번째 대사도 모순어법. “이렇게 더러우면서도 고운 날을 본적이 없다.” 어쩌면 “오늘은 날씨가 거친 날이긴 하지만 전투에 이긴 좋은 날이다.” 하는 뜻으로 한 말일까?
처음에는 그냥 말장난 같던 모순어법이 차차 비극으로 발전한다. 연극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움직이는 숲”이 현실화 되는가 하면 “여인에게서 태어나지 않는 사나이”가 주인공의 앞을 가로막는다.
결국 악마의 암시는 맥베스를 끝없는 나락으로 몰고 간다. 맥베스는 울부짖는다. “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배우처럼 한동안 무대에서 활개치고 안달하다 사라져버리는 것,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 같은 소음, 광기로 가득하나 전혀 의미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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