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만 원으로 일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청년 시절에 단돈 천 원이 없어 하루종일 방 안에서 사색하여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겨울인데도 햇볕이 기분 좋게 내리쬐는 가운데 다사로운 기운이 가져다 주는 분위기를 느끼며, 카알 힐티의 『행복론』을 읽으며 언젠가 찾아올 행복을 마냥 기다리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현재의 나는 너무 행복합니다. 적어도 만 원으로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고 교통비까지 감당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기도 합니다.
그 해 겨울 소도시 전주에도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함박눈이 정원의 과실나무들을 솜이불처럼 덮었고, 온 도시가 하얀 눈으로 칠해졌습니다. 우리집에서 백 미터 떨어져 있던 D교회는 전주역 가는 길목에 있었습니다. 벽돌집으로 지어진 예배당은 고딕 양식의 높다란 창문이 있었고, 뾰족 첨탑 위의 하얀 십자가가 멀리서도 보일 만큼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옆으로 목조로 된 종탑이 있었는데, 거기서 커다란 종이 새벽에 울릴 때마다 어머니는 종종 걸음으로 예배당으로 발길을 옮기곤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신앙심은 가족에게도 전해졌고, 3남 4녀의 형제들은 모두 교회에서 성가대나 교사로 활동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다가올 크리스마스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2월이 되면 어린이들은 성극이나 성극, 성경 암송 등을 준비하느라 분주하였고, 우리 형제들은 제각기 칸타타나 성경 암송 등을 저녁 늦게까지 연습하였습니다. 초저녁에 저녁을 먹고 나면 여섯 살 배기인 나도 초등학생인 누나들을 따라 예배당에 갔습니다. 소도시 교회인지라 우리를 지도하는 교사 J는 칸타타 연습을 끝낸 후 아이들을 모아 연습시키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J선생이 나타나기 전의 한 시간 가량은 아이들의 놀이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교육관 마룻바닥 위에서 술래잡기도 하고, 공기 놀이도 하였습니다.
나는 착한 아이여서 누나들과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내 옆에는 단발 머리를 한 영희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유치부 어린이로서, 전주 형무소에 가서 공연할 성경을 암송하는 나의 단짝이었습니다. 나는 누나들 옆에서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있다는 게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얼굴이 예쁜 여자 아이한테는 어떻게 내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서양화에서 반바지를 입은 소년이 예쁜 여자 아이의 볼에 뽀뽀를 하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예쁜 영희의 볼에 그만 나도 모르게 뽀뽀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갑작스런 뽀뽀 세례를 받은 영희가 마구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누나들이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너, 왜 그러냐? 좋으면 좋다고 말로 헐 것이지.”
누나들은 영희를 달래느라 눈깔 사탕을 구해다 주었습니다. 영희는 그 사탕을 볼에 가득 담고 울음을 그쳤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서울로 올라와 S고에 입학을 하였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편지 한 통이 집으로 배달되어 왔습니다. 여학생에게서 온 편지였는데, 나는 여학생이 먼저 편지를 보낸 사연을 발신자에게 당당히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학생은 J중학교 졸업 앨범을 보고 내 주소를 찾아냈다며, 나와 펜팔로 교제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편지가 몇 차례 오가는 가운데 나는 그 여학생이 어릴 적 영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편지 교제가 일 년이 지난 즈음 영희에게서 소식이 뚝 끊겼습니다. 나는 영희가 어디로 이사라도 갔나 싶어 궁금하였지만,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던 터라 영희가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편지를 끊었나 보다고 생각하며 공부하는 데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나와 단짝이던 K가 하숙집 여학생을 소개시켜 주겠다며 집에 놀러 오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K의 하숙집에 놀러갔지만 어른들의 감시가 심해서 그 여학생과 직접 만나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자 K는 영어 단어를 외워야 한다면서 쉬는 시간에도 책을 들고 다녔고, 얼마 후에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나와의 절교를 선언해 버렸습니다. 나는 K의 갑작스런 절교에 당황스러웠지만, 입시를 앞두고 있어서 그냥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고교를 졸업한 후, K는 동창회 모임에도 영 얼굴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친구들 사이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K가 병태의 펜팔 친구를 빼앗아 결혼해 버렸대.”
나는 그제서야 고교 시절 K가 나에게 갑자기 절교를 선언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K는 나의 펜팔 친구였던 영희와 결혼하게 되어 삼십 년 이상을 동창회에 나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자식. 그럼 진작 나한테 고백을 할 것이지.’
요즘도 K는 동창회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진작에 K를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가족과 함께 만 원의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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