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2(토)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

28. 종교개혁과 프랑스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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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관련된 당시 유럽 국가들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 일단 두 개의 거대한 권력 단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종교적 권력, 그리고 각 제국들의 정치적 권력이 서로 협조하거나 대립 양상을 띠고 있었다. 때로, 국왕들이 종교개혁 사상을 지지하고 협력하려는 경우도 있었고, 오히려 교황의 힘과 결탁하여 개신교 세력 박멸에 앞장서서 개혁운동을 저지하는 상황도 자주 발생하였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그 양상이 특이하였다. 이미 언급되었던 성 바돌로매 축일의 대학살 사건을 통해서 수만 명의 개신교인들을 학살했던 프랑스에 대하여 교황은 열렬하게 지지하며 축하하였고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양자가 서로 일치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후로 프랑스에서는 개혁신앙 자체 뿐 아니라 성경에 기초한 신앙 자체를 거부하고 부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로마교회의 비지성적이고 비이성적인 신앙의 양태(樣態)로 인한 부작용과 부패를 경험한 프랑스에서는 이제 신(神) 자체를 거부하는 무신론의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교회의 교권주의 영향
교회에서 가르치며 강조하는 모든 신앙과 교리의 원칙들은 성경에 근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로마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여 인본주의 신앙으로 변질되어 가면서 나타난 현상 중의 하나는, 성경의 가르침과 원칙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주장하고 추진해 나가는 여러 가지 종교적인 관습이나 의식이나 교리들 가운데 신앙의 기준인 성경에 위배되는 것들이 계속 발생하게 되면서, 이러한 것들을 감추고 가리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취해진 조치가 바로 평신도들이 개별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연구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정책이었다. 그래서 로마교회는, 성경을 펼쳐들고 개혁신앙을 주도하는 종교개혁자들과 그 운동에 동조하는 국민들을 격렬하게 핍박하였고 살해하였던 것이다. 교황 측에서는 국왕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개혁을 하게 되면 국민들이 국가에 반기를 들고 저항하기 때문에 사회가 무질서와 혼란에 빠질 것이므로 결코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면서 함께 힘을 모아서 개혁신앙을 박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무시하고 덮어둔 채 인본주의적인 신앙에 물들어가고 있는 사회나 국가는 마침내 진리의 빛을 상실하게 되고 어두움의 그늘이 깊어지면서 국가는 전반적으로 피폐해진다. 국민들은 부도덕한 타락의 늪으로 빠져들어 결국 패망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 혁명 전의 국가적 상황
프랑스에 밀어닥친 개혁신앙에 대한 광적인 박해를 피하여 개신교인들로 불리어지던 위그노들이 고국을 등지고 주변의 여러 나라로 피신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양심적이고 능력 있는 과학자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법률가들과 교사들을 비롯한 유력한 지도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특출한 인물들이 대거 이주해 나가면서 프랑스에는 일반적인 쇠퇴 현상이 일어났고 도시들은 타락하게 되었고 지방의 비옥한 토지들은 황무지로 변하면서 국민들 가운데는 도덕적 퇴폐의 분위기가 만연하였다. 왕들과 성직자들과 귀족들과 부자들은 호위호식하며 탐욕과 방탕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반면에 농민들과 가난한 자들은 약탈과 착취로 인하여 매우 빈곤하고 처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도덕적 가치 기준과 국가와 위정자들에게 충성하는 정신을 일깨워주는 성경의 교훈들을 제대로 접촉하지 못하는 국민들이 결국에는 부도덕하고 타락하여 정부에 저항하는 국민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다
1776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면서 유럽에도 자유의식이 고조되기 시작하였고, 피폐한 삶을 살아가던 프랑스의 농민들과 도시 평민들의 분위기도 이에 영향을 받아 지도자들에게 대한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때마침, 1788년에 몰아닥친 유례없는 흉작으로 농민들의 불만이 터지면서, 1789년 도시민과 농민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일어난 폭력적인 혁명이 수 년 간에 걸쳐서 무자비하게 전개되었고 마침내 정치 종교 사회 전반에 걸친 체제를 완전히 전복시키고 말았다. 수많은 살육과 폭력이 프랑스 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프랑스가 로마 교회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자들을 죽이기 위하여 화형주를 세웠던 그 자리에, 프랑스 혁명당원들이 부패 정권의 지도자들을 처형하는 단두대를 세웠다. 무수하게 많은 정부 지도자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왕과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흥분하여 미친 듯이 날뛰는 군중의 잔악무도한 행동을 제지할 수 없었고 그들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들의 폭력과 잔악한 행위와 살육은 이미 로마교회가 성경의 신앙을 고수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고문하고 죽이던 무자비한 행위들로부터 배운 것들이었다. 뿌려놓은 씨앗의 열매를 거둔 셈이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이제 로마교회에서 배웠던 종교와 하나님 신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자기들을 그와 같이 피폐하고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한 기독교를 증오하면서 신앙에 기초가 되는 성경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불태워버리는 일을 자행하였다. 성경에서 유래한 1주일 7일 제도를 10일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날 휴일은 방탕의 날로 보냈다. 이제 프랑스는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무신론자들과 불신자들과 배교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마침내 프랑스 의회는 공공연하게 프랑스를 무신론 국가로 규정하고 ‘이성(理性)의 여신’을 신으로 추대하는 결의를 하였다. 의회는 오페라단의 한 무희를 등장시켜 그 여자를 ‘이성의 여신’으로 받들고 그에게 공적인 경배를 하는 의식을 감행하였다. “여신은 의회장의 포옹을 받은 후 화려한 수레에 태워져 많은 군중 사이를 통과하여 노틀담 성당으로 인도되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위치를 차지하여 높은 제단 위에 앉아 참석한 모든 자의 경배를 받았다.”

프랑스 혁명의 결과와 성경의 승리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린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48:22). “악한 자는 그 악을 인하여 넘어지리라”(잠 11:5).
프랑스는 극도의 혼란과 갈등을 통해 또 다른 양상의 폭력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지방은 황폐하였고 도시들은 파괴되었다. 프랑스 국가 자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종교, 법률, 사회적 질서, 가정제도, 국가, 교회 등 모든 분야에 극심한 균열이 생기면서 국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세력들이 정부를 전복시키고 권력을 쟁취하였지만, 내부적 갈등과 분쟁은 계속되었으며, 이와 같은 투쟁에서 승리한 자코뱅 당은 독재 정치를 통해 반대파들을 단두대로 보냈고 무시무시한 공포정치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무질서와 혼란을 경험한 프랑스는, 1793년에 의회에서 결의했던, ‘그리스도교를 폐지하고 성경을 금지하는 법령’을 3년 반 만에 취소하고 다시 성경을 용납하는 의안을 결의하였다. 온 세계는 성경을 거절한 나라에 임하는 재앙과 재난을 목도하였다. 주 10일 제도는 원래의 7일 제도로 돌아왔고 성경은 이전보다 더 높임을 받았다. 1804년에 영국성서공회가 조직되었고, 1816년에는 미국성서공회가 창설되어 유사 이래로 가장 많은 성경들이 수백 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온 세계로 펴져나갔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 40:8)는 말씀의 성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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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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