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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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영국 청교도들의 신대륙 이주

1534년 국왕 헨리 8세가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유로 영국 성공회와 로마교회 교황과의 결별을 선언하였고, 그 후 1559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반가톨릭법을 강화시켜 교회와 관련된 새로운 정책을 시도하였다. 당시 성공회는 가톨릭에 속한 교회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개혁교회도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정책은 영국 내에 혼재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이해하며 공존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국가의 권력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면서, 소위 ‘국교주의’ 사상이 개신교 전반을 지배하였고, 국가가 예배의식이나 교회 출석 등을 간섭하고 강요하면서 또 다른 의미에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경중심의 자유로운 신앙을 추구하던 청교도들은 국가로부터 수색을 당하고 투옥되거나 추방되거나 심지어는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청교도들은 마침내 비교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네덜란드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네덜란드로 이주한 영국의 청교도들
청교도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할 때에 그들은 집과 재산과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떠났다. 대체로 물질을 신앙보다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비교하면 저들의 신앙은 참으로 순수하고 진실하고 담대하였다. 네덜란드에서 청교도들은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고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들이 생활하기에는 낯설고 힘든 곳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더욱 든든해지고 깊어졌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 일부 청교도들은 더 나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다시 신대륙(미국)으로 이주하기로 하였다. 그들이 네덜란드를 떠날 때 그들의 영적 지도자였던 존 로빈슨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그들과 함께 떠날 수 없게 되었는데, 그의 고별설교의 일부분은 오늘날 현대 개신교회가 깊이 새겨보아야 할 귀중한 교훈을 담고 있다.
“나 개인으로서는 개신교의 상태에 대하여 탄식해마지 않습니다. 그 교회는 한 때 신앙적이었지만 개혁 운동을 일으킨 인물들 이상으로는 한 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형편입니다. 루터교도는 루터가 깨달은 것 이상은 더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 칼빈파의 신도들 역시 여러분이 보는 바와 같이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깨달았다고 할 수 없는 그 사람이 남긴 것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탄식할 수밖에 없는 불행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그 당시에는 밝게 비치는 빛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리의 전부를 밝히 깨닫지는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그들은 분명히 저희가 처음에 받은 빛 이상의 빛을 받고자 갈망할 것입니다.”(D.Neal, History of the Puritans, vol.1, 269).
암흑시대 동안에 훼손되고 가려지고 파묻혀버린 성경의 진리를 하루아침에 밝혀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들의 평생 동안 밝혀낸 성경의 진리는 전체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진리가 밝혀지는 것은 점진적인 과정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잠 4:18)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진리를 찾는 일을 멈춰서는 안될 것이다.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의 실수
영국을 떠나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청교도들을 ‘분리주의자’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신대륙으로 떠나는 배를 타기 위해 영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1620년 9월에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여 메이플라워호 배를 타고 수개월 간의 항해 끝에 12월 21일, 남자 78명 여자 24명, 도합 102명이 미국 버지니아 플리머스에 도착하였다. 겨울철에 도착한 그들은 초기에 뼈저린 고생을 하면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으나, 원주민의 도움으로 농사를 배우고 이듬해 봄이 되면서 비교적 안정한 삶을 시작하였다. 1630년에는 또 다른 한 무리의 청교도들이 플리머스 북쪽에 있는 한 지점에 도착하여 매사추세스베이 식민지를 설립하였다.
1640년 경에는 약 2만 여명의 영국계 이민자들이 새로이 형성된 뉴잉글랜드에 거주하게 되었고, 1691년에 플리머스가 매사추세스베이 식민지에 통합되면서부터는 먼저 이주해왔던 분리주의자(청교도)들은 더 이상 분리된 상태로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의 종교생활을 주도하게 되었다.  
뉴잉글랜드의 주도권을 잡은 청교도들은 원주민들을 무시하고 박대하는 태도를 취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원주민들이 청교도의 정착촌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정착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청교도들은 다시 보복하였고 이로 인한 전쟁이 오래 지속되었다. 마침내 청교도들은 원주민 인디언 추장 필립을 체포하여 그를 참수하였고, 사지를 네 방향으로 잡아당겨 찢는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청교도의 기독교 정신을 상실한 행위였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찾아 그 먼 거리를 이주해 온 청교도들이 자신들과 다른 주장을 하거나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핍박을 가하였다. 교인들만이 참정권을 가질 수 있었고 정부의 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가톨릭의 종교 박해를 피해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또 다른 형태로, 자신들과 다른 신조를 따르는 신앙인들을 핍박하고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어쩌면 이것이 죄악의 본질을 타고난 인간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류는 발전하지만 인간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형태만 다를 뿐이지 이러한 양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외친 용감한 투사
신대륙에 영국인들의 이민이 시작된 지 약 11년 후 로저 윌리암스라는 청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영적으로 성서적으로 매우 확고한 신앙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가가 범죄를 예방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의무를 규정하고 간섭하는 것은 월권이고 부당하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정부가 정한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에게 벌금을 가하거나 투옥하는 것은 영국의 국교주의와 같은 것이므로 결코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로저 윌리암스는 결국 국가의 정치와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불순 인물로 간주되어 식민지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고, 14주간을 혹독한 추위 속에서 피신하여 다니면서 기적 같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의하여 생존하게 되었다. 때로는 인디언의 부락에서 피난처를 찾기도 하였고, 수개월 동안 여러 지역을 떠돌며 헤매던 끝에 근세(近世)에 신앙의 자유와 권리를 가장 철저하게 보장하고 승인한 최초의 주(州)라고 할 수 있는 로드 아일랜드 주(州)의 기초를 놓았다. 그 주는 당시 신앙 박해로 고난당하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인구가 계속 증가하여 번창하는 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 주(州)가 표방하는 정교분리의 원칙과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마침내 북미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이렇게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보장된 풍요한 나라로 많은 사람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 신대륙의 나라에 와서 신속하게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은 개신교인이 되는 것이었다. 진정한 신앙심 없이 생존과 출세를 위하여 신앙고백을 하며 신앙인이 되는 사람들이 급증하게 되었고 마침내 교회는 그들의 영향력 때문에 세속화되고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로마 콘스탄틴 황제 시대에 기독교로 개종한 이교도들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타락했던 역사가 미국에서 되풀이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개신교계에도 새로운 개혁의 필요가 절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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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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