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띠 해“라는 데, 개와 인간과의 관계를 보도하는 뭉클한 뉴스는 정작 올 해가 개띠 해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을 법한 프라하에서 날아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새해 들어 몇 날 되지 않은, 정확하게는 2018년 1월 3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아파트에서 몇 주 전에 사망한 주인의 시체를 지키며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한 마리의 개를 발견했다는 것.
올해 아홉 살이 되는 하바니즈 견의 이름은 “Zaszsa”(어떻게 읽어야할지 몰라 그냥 알파벳으로 적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사람들이 발견했을 때 개는 심각한 탈수 상태였다나. 고령의 여인이 한 동안 보이지 않게 되자 이웃 사람이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집안을 조사했더니, 자연사한 지 꽤 되는 듯싶은 66세의 여인 곁에 Zaszsa가 주인의 시신을 지키고 있었단다. 탈진한 상태여서 조금만 늦게 발견되었다면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수의사들의 진단. 이제는 서서히 회복하고 있는 듯 쓰다듬어주는 동물애호가단체 회원들에게 꼬리를 흔들어준다고 했다. 외롭게 죽어가는 늙은이를 그것도 사후에까지 돌보아 준 것이 사람이 아니라 개였다는 미담(?) 한 토막이 개띠 해 첫머리를 흐뭇하게 데워준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그런 미담을 남길만한 개를 찾아볼 수가 없다. 대체로 옛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가축으로 기르는 개가 그리 흔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눈에 개들이란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상태의 짐승들로, 흡사 늑대와 같은 존재로만 비쳤을 지도 모른다. 그들 대부분은 양치기였기에(창 47:3) 당연히 양을 치고 지키기 위해서 개를 이용했을 법하나 실제로는 양 무리를 다스리기 위해 개의 힘을 빌리는 일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치기 스스로 선두에서 양떼를 인도하는 것이 이상형이었다. (요 10:4) 이 독특한 이스라엘의 습성은 지금도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는데,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에서는 호주나 영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대규모 목장을 경영하고 있지 않아서일 거라고 짐작해보게도 되지만.
“그들은 저녁만 되면 돌아와서, 개처럼 짖어 대면서, 성 안을 이리저리 쏘다닙니다.”(시편 59:6) 하는 표현이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개에 대한 선입견이었던 것 같다. 그런가하면 지도자를 개에 비유해서 야유할 정도였으니. “지도자라는 것들은 굶주린 개처럼 그렇게 먹고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백성을 지키는 지도자가 되어서도 분별력이 없다. 모두들 저 좋을 대로만 하고 저마다 제 배만 채운다.” (이사야 59:11)
만약 수도 없이 개체가 늘어난 개들이 성서를 읽을 수 있다면, 적어도 성서가 그리고 있는 개들처럼 사납다면, 억울해하기보다는 분노해서 성서를 물어뜯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러나 적어도 구약성서 시대의 팔레스티나 사람들은 개들이 싸움터에 모여들어 전사자를 뜯어 헤쳤다거나, 사람의 피를 빨고 죽은 자의 고기를 먹는다는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 예사로웠고, 오늘날에도 팔레스티나에서는 그런 광경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고 한다.
한편 개에 대한 이미지를 자신에게 적용해서 지극한 겸손을 나타내기도 했다. “개보다 나을 것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왕하 8:13)하는 모양으로. 개에 대한 시선은 <신약>에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예수의 언급도 그렇지만, 바울도 “개들을 조심하라”하고 경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가 거들어 한 여인이 사랑하는 딸을 죽음에서 구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야기는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로 시작된다.
예수가 거기를 떠난 것은 이를테면 “발의 먼지를 터는 행위”였을 지도 모른다. 바리새파 율법학자들, 직업적인 종교인들이 우글거리는 그곳을 떠났다고 읽어보자. 어느덧 몸에 배어버린, 그래서 어느덧 절대화해버린 체취. 예수는 그 냄새에 진저리가 난다.
그러나 이방인의 세계에서 예수는 한 여인의 말을 듣는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개만도 못한 자가 되어 간구하는 한 여인의 소원을 예수는 듣는다. 그리고 여인은 소원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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