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1.jpg
 오늘도 아파트 단지 안을 감도는 이름 모를 새소리에 잠이 깼다. 잠에서 깨기 전 매일 새벽마다 영감을 가져다 주시는 그분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며 컴퓨터를 켠다. 오늘도 나는 살아 있으며, 나만의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내가 그분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매일 새벽마다 그분이 영감의 만나를 내려주시는 것 하나만이 아니다. 그분은 나에게 말씀을 주셨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로마서> 8:15-16). 그분은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나는 한때 성담론을 연구하였다. 그것은 성의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켜 사회적으로 금기시하지 말고 성의 긍정과 부정, 곧 성의 본질을 알아 몸의 말초적인 것을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에 관한 책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거기에는 나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에너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령 S. 프로이트가 말하는 리비도(Libido)는 성적 욕망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고, C.G. 융이 말하는 그림자 현상(The Shadow)에는 창작열과 같은 에너지도 있지만 부정적인 에너지도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김동인의 「아라삿버들」(<신소설> 1930)을 보아도 그랬다. 김장의네 집에서 머슴 일을 하는 최서방은 마흔두 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도 부지런히 하였고, 솔직하여 김장의의 신임을 얻었다. 최서방은 버들 한 가지를 “어디서 얻어다가 자기 방 앞에 심었”다. 그것이 무럭무럭 자라서 지붕마루를 덮을 만큼 크게 자랐다. 버드나무는 새끼까지 쳤다. 그것을 보고는 김장의가 최서방에게 결혼을 하라는 운을 떼었지만, 최서방은 부끄러워서 차마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최서방은 버드나무가 새끼를 쳤다는 말을 자주 하여 김장의여자를 골라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최서방의 성욕은 더욱 부풀어올랐고, 그의 성욕은 동네 처녀들에게 몰래 욕을 보이고 살인을 할 정도로 주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이웃 동네에까지 그의 광란이 계속 되었다. 그 행위는 신문에까지 오르내렸고, 결국 그는 색마의 행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덜미를 잡히게 되었다. 서술자는 최서방이 “사형대 위의 이슬로 사라졌”음을 알리면서 이렇게 정리하였다. “그에게 일찍 한 마누라를 주어서 그로 하여금 그런 광포성을 발휘할 기회를 없이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개인에게 나타나는 그림자 현상-The Shadow, 가면적 인격인 퍼소나(Persona) 밑에 감추인 어두운 측면의 심리 현상-을 다스리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끔 신문 기사를 보면 사회적으로 위엄이 있다고 정평이 난 사람이 간통하다가 들켰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다. 개인에게 색욕이 아예 안 생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욕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아를 가지고 성본능을 자제한다. 그러나 성적 욕망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때론 그것이 자아를 뚫고 나와 일을 저지를 때도 있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것을 이겨낼 수 있었다. 곧 음란함 등 어둠의 유혹이 밀려올 때 나를 그 유혹에서 이길 수 있게 해 주신 분이 성령이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8:4). 바울이 한 이 말은 나의 뇌리를 때렸다. ‘이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나를 환하게 미소짓게 하였다. 그것은 바로 나를 내가 아닌 성령이 인도하시게 하는 믿음이었다. 성령이 나를 이끄시어야 사탄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령이 내 안에서 인도하시니 나의  성적 욕망은 가정의 테두리 안으로 가라앉을 수 있었고, 창작열과 같은 긍정적인 데로 나의 정신적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었다. 성령이 인도하시자 내 안에는 음란함에 관심을 두지 않고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가 자랄 수 있었고, 사물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문학 단체 활동을 하면서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나의 간절한 간구도 있었지만 그분이 나를 찾아오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분은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여 주셨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게 하셨다. 그분이 인도하신 행동은 내가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정언에 따라 율법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분이 내 안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고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나의 죽을 몸도 살리셔서 영원으로 나아가게 하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도 아파트 앞에는 전동차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여행 가방을 들고 여행을 간다. 그분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원한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기독교인의 행복론 - 67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