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본란에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관계되는 글을 올렸을 때, 면식이 있는 한 독자에게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질문에서 뭔가 석연치 않다는 낌새가 느껴져 베니스의 상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대답을 망설이기에 “혹 유대인 샤일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했더니 “그렇지 않느냐?”며 되물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독자는 베니스의 상인이 바로 유대인 고리 대금업자 샤일록이라 믿고 있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싶어서 다시 몇 친구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해보았더니, 이게 웬 일인가 다들 “베니스의 상인은 유대인 샤일록”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둘러 정답(?)부터 밝혀놓기로 하자.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아니라, 안토니오를 가리킨다. 공들여 원작을 읽은 이가 그리 많을까마는, <셰익스피어 이야기>와 같은 해설서를 통해서라도, 주인공 베니스의 상인이 샤일록이 아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터인데도, 적잖은 이들이 혼돈하고 있는 데에는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혹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유교적 직업관이 은연중에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혹 하는 마음으로 일본의 문헌을 뒤졌더니, 아니나 다를까 1995년 <문예춘추(文藝春秋)> 2월호에 실린 <베니스의 상인에 대한 큰 오해>라는 글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언론들이 “모든 악의 근원은 베니스의 상인이 되어버린 일본인의 정신구조에 있다”며, 일본 땅값 상승의 책임을 논하고 있는 논평자들의 무식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이었다. 그 글이 일본사회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훗날에 널리 읽혀지고 있는 작가 이츠키(五木寬之)는 “나도 베니스의 상인은 대금업자 샤일록이라고 알고 있었다. 부끄러운 일이다.”하고 고백하기도 했다.
<베니스의 상인>의 주 무대가 되어 있는 베니스의 정서는 사뭇 달랐다. 우리가 상인이라 번역하고 있는 merchant는 함부로 얕잡아 볼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었다. 상인 안토니오는 베니스에서 존경 받고 있는 인사이다.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고결한 인격을 드러내기 위한 들러리인 셈이다. 유대인 “샤일록”은 히브리어 shalach에서 유래한 단어로 욕심쟁이라는 뜻.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을 쓰기 전에 영국에서는 유대인 고리 대급업자를 다룬 연극이 더러 상연되었었다. 1564년생인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을 쓰기로 마음먹은 1596년은 동갑내기 동업자 크리스토퍼 말로가 얼마 전에 <마르타 섬의 유대인>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었을 즈음이었다. 그 작품에서 유대인의 이름은 바라바스.
<마르타 섬의 유대인>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니 그랬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투지를 불태워 비슷한 주제의 작품을 구상했는지도 모른다. 두 작품 모두가 지중해의 무역도시를 무대로 해서 무자비한 대금업자 유대인을 중요한 등장인물로 다루고 있다. 두 인물 바라바스와 샤이록은 크리스천들의 차별과 박해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고 있다. 간교한 수법으로 원풀이를 꾀하지만 결국에는 자기가 판 우물에 빠지게 된다는 줄거리가 비슷하다.
그러나 <마르타 섬의 유대인>에서 바라바스는 연극 전체를 압도하는 주역이어서 모든 대사의 49%가 바라바스의 몫으로 배정되어있다. 그러나 <베니스의 상인>에서의 샤일록은 아주 강한 인상을 주는 등장인물이긴 해도 주역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준 주역이라고나 할까. 총 20장면으로 구성되고 있는 연극에서 샤일록이 등장하는 것은 고작 다섯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제목은 <베니스의 유대인>이 아니라 <베니스의 상인>인 것이다. 물론 제목에서의 “상인”은 진정한 주인공 안토니오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상인이라 불리고 있는 인물은 샤일록이 아니라, 대무역상 안토니오라는 것은 확실하다. 샤일록은 연극 <베니스의 상인>을 구성하는 몇 개의 줄거리 중의 하나에 속한 배역의 하나에 불과하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중심 줄거리는 어디까지나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가 친구 밧사니오가 사랑하는 포샤와 결혼할 수 있도록 돕는데, 그 과정에서 유대인 샤이록의 모함으로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했지만, 모두 해피엔드로 끝이 난다는 코미디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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