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아일랜드에 한 왕이 후계자가 없어 고민하던 중 전국에 방을 붙이도록 했다. 자질 있는 모든 젊은이는 왕이 될 수 있다는 것. 단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자신이 백성을 사랑하고 있으므로 도전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워낙 가난해서 왕을 만나러 갈 옷이 없었다. 이에 일부는 빌리고 또 막일을 해서 적당한 옷을 장만했다. 옷이 갖춰지자 그는 길을 떠났다. 그런데 가는 도중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와 마주쳤다. 거지는 다 떨어진 옷을 걸친 채 그에게 동정을 구했다. ‘제발 도와 주세요. 배가 고파 죽겠습니다.’ 거지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그는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 주머니에 있는 몇 푼의 돈마저 모두 주었다. 그는 남루한 옷때문에 망설였지만 왕궁을 향했다. 궁궐에 도착하자 왕이 웅장한 거실에 않아 그를 맞았다. 그는 감히 왕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머리를 조아려 경의를 표했다. 왕이 말했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 했네. 고개를 들고 나를 보게!’ 일순간 그는 너무 놀라 쓰러질 뻔했다. ‘당신은 며칠 전 그 거지...?’ ‘그렇게 놀랐는가?’ 왕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어떻게...?’ 젊은이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내가 거지로 변장한 것은 왕이 되겠다는 사람이 정말로 백성, 특히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는 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네. 내가 지금처럼 왕의 모습으로 만났으면 자네가 백성을 진정 사랑하는지를 알 수 없겠지. 그래서 머리를 썼다네. 자네가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으니 내 후계자가 되어주게. 이제 이 왕궁의 주인은 자네일세’
그러나 반드시 사랑과 관심 어린 마음을 가지고 선을 실천해야한다. 마음에도 없는 물질을 베푼다면 그것은 선이 아니라 값싼 동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라도 마음에 사랑의 향기를 품고 관심의 눈빛을 지니며 선을 행해야 한다. 선행과 구제는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예배)이기 때문이다(히 13:16).
주님께서는 소자에게 선을 베풀 것을 명하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있는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하셨다. 그러기에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요일 3:18) 오직 선행과 구제로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사랑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빌 4:18).
이는 참으로 그분이 기뻐하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비록 선행과 구제가 너무 빈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러한 것들을 당신의 마음에 합한 예배행위로서 받으신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항상 선행의 제사를 드리도록 애써야한다.
이는 단순히 주일, 혹은 공적인 예배에만 드려지는 제사가 아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일상의 모든 곳과 모든 때에 드려져야 할 제사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것을 필요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살아야 한다. ‘나눠주다’란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 내에서 다른이들에게 좋은 것을 나눠줌으로써 마땅히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았고(엡 2:10) 또 고명한자 즉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며 그 고귀한 일을 펼치며 살기 때문이다(사 32:8.) 뿐만 아니라 긍휼을 행지 않는다면 긍휼 없는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약 2:13). 이는 분명 행한 대로 갚으며 뿌린 대로 거두시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갈 6:7)의 반영이다.
항상 이웃에 대해 무정하고 냉혹하게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두려운 경고임과 동시에 사랑과 긍휼을 풍성히 베푼 자에게는 기대와 소망을 주는 말씀이다. 마지막 심판의 날이 두려운 날이 될지, 기쁨과 소망의 날이 될지는 오직 우리의 태도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항상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자들이 되어야한다.
세상에서 무정하고 냉혹하게 행동했던 모든 자들이 두려워 떨며 심판대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의 칭찬과 함께 영광의 부활로 나아가는 복된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 교회연합신문 & www.ecumenicalpres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