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1.jpg“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누가복음> 23:34).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구절이다. 예수님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는 일화가 성경의 여러 군데서 나타나지만, 이 말씀에서도 그가 인간과는 다른 존재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아마도 자신을 배신한 가롯 유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부인한 베드로,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빌라도, 며칠 전까지만 하여도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를 외쳤으나 급작스레 마음을 바꾼 군중, 그리스도가 군중의 환호를 받는 것을 시기한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을 다 쓸어 엎어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대함은 사랑과 용서였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스도는 편견에 사로잡힌 저들의 무지를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확인시키기보다는 그리스도로서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비록 그 길이 험난하고 고통스런 길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질 희생양이 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걸어가야 할 정도正道였다.
살다 보면 타인에 대하여 원망스러운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왜 교계 지도자들이 싸움질만 하는가, 왜 김정은은 핵무기를 만들어 한반도 평화 분위기를 깨려 한단 말인가, 왜 독자들이 문학 작품보다 게임이나 K-Pop에만 더 연연한단 말인가, 왜 자식들이 부모의 바램대로 살지 않는가, 왜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몰라 준단 말인가 등등. 이럴 때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를 생각해 보게 된다. 주님은 사람들이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이해하지 못하여도, 끝내 희생양의 길을 택하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편협한 식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탓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을까.
그 방법은 아마도 나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나에게 주어진 길은 작가의 길일 것이다. 종종 작가로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메시지를 묵묵히 형상화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그 소명을 이루도록 주님이 활력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삼손에게도 활력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생긴 힘이 그의 긴 머리칼에서 생기는 것으로만 알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힘을 주신 것을 알지 못하였다.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사사기> 16:20). 삼손의 잘못은 여호와보다 들릴라를 더 사랑하였다는 점이었이다.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사사기> 16:31)내면서 그는 활력을 달란트로 받았지만, 들릴라와의 사랑에 빠져 자신에게 힘을 주신 여호와에 대한 경외심을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이는 교단 지도자들이 감투 싸움에 휩싸여 주님을 망각할 때 삼손과 같이 주님이 주신 힘이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과 유사하다. 교계 지도자들이 감투 싸움을 벌일 때 평신도들을 지도하는 힘을 잃어 버린다는 사실을 왜 알지 못하는가.
평신도들이여. 이제 주님을 바라보자. 성령이 우리에게 직접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녀의 안녕을 위해 기도할 때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억하자. 개인에게 주신 달란트를 주를 위해 쓰는 지혜를 발휘하자. 삼손에게 힘을 주셨던 여호와를 기억하자. 그가 여호와의 뜻에 따를 때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인 기록을 보자. “삼손이 레하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이 나귀의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사사기> 15:14-15). 여호와의 영이 임할 때에 삼손은 혼자서 천 명을 상대하여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활력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제 주님이 주신 달란트로 삶에 활력을 찾도록 하자. 주님은 교단 지도자에게만 찾아오시는 것이 바로 이 순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남을 탓하고 원망하기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주님은 이 시간, 아직도 어둠에 휩싸여 편견에서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가르칠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미를 남에게 강요하기보다는 스스로 실천할 것을 주님은 원하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자식과 이웃과 지인 들이 편견에 휩싸여 있음을 탓하기보다는, 나 자신이 사랑와 용서를 온전히 실천하였는가를 점검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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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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