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성가한 호색한 표도르 카라마조프가 죽임을 당하고 맏아들 드미트리가 범인으로 체포된다. 그러나 독자들은 스메르자코프가 진범임을 알고 있다.
“24세 전후의 남자 스메르자코프는 무척 사람을 싫어하고 과묵한 편, 사람을 가리거나 수줍어하기 보다는 오히려 거만한 편이어서 모든 사람을 멸시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를 양육해준 그리고리의 말대로라면 “도대체 감사란 것은 모르고 자라서인지 늘 구석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얼굴을 가리는 소년이었고. 고양이 목을 졸라 죽여서 장사해주는 일을 즐기곤 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를 자칭하는 둘째 아들 이반은 대학을 나온 수재. 신분으로나 지성으로나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위에 있는 이반이지만 내심 스메르자코프를 두려워한다. 비굴한 녀석이라며 얕잡아 보면서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얼른 납득이 가지 않을 터이지만 나름대로의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스메르쟈코프는 이반이 지닌 지성에 대해서, 특히 신을 부정하는 냉소적인 자세에 대해서, 일종의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스메르자코프가 상전의 아들 에게 다가 오려하는 것을 이반은 자신이 하인과 한 통속이 되는 것 같아 싫어했지만, “이반은 하인 녀석이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음을, 그러면서도 그 사나이의 마음을 견디지 못해하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어디서나 쳐들어가기를 좋아하는 스메르자코프는 이반이 몰래 가지고 있는 생각, 다시 말해서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뿐만 아니라 맏아들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소리치고 다니는 노릇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이반이 사건 현장을 떠나가게 한 후, 드미트리가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간 시기를 교묘히 이용해서 스메르자코프가 표도르를 살해한 것이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스메르자코프에게 아버지를 죽여 달라는 암시나 사주를 하지 않았음에도, 발생한 살인이 빌미가 되어, 이반은 스메르자코프에게서 자신이 살인범이라는 협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살인을 위탁한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떠나간 것이잖아요. 그날 밤 나는 살인 사건의 주범은 당신이란 사실, 비록 내가 직접 손을 썼다할지라도, 내가 주범은 아니라는 사실을 얼굴을 맞대고 당신에게 증명하려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법적으로도 살인범입니다.”
이반이 뚜렷하게 아비를 죽이라고 지시한 것은 아니지만, 미묘하게 암시했다는 것. 그러니까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여행을 떠난 일이 스메르자코프에게는 ‘내가 없는 사이에 처리해다오’ 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 졌다는 것, 그러니 이반이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설사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더라도, 스메르자코프는 일을 서두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이반을 협박한다.
둘의 관계는 완전히 뒤바뀌고 만다. 비굴한 겁쟁이의 화신이라 여겼던 스메르자코프에게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들먹였던 이반이 이제 그 녀석 앞에서 떨고 있다. 스메르자코프를 그렇게 교육한 것은 이반 자신이었다. 이반의 메시지 “모든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표도르에게서 훔친 대금을 앞에 두고 스메르자코프는 말한다. “이만한 거금을 가지고 모스크바로? 아니 욕심대로라면 외국에서 살아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은 용서받는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그렇게 가르쳐주었지요. ‘영원한 하나님이 없다면 그 어떤 선행도 존재할 수 없으니, 그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하고 말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이반은 차별받는 민중 스메르자코프를 계몽했고, 이론을 앞세우는 지식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스메르자코프는 거침없이 실행에 옮겼다. 그 스메르자코프가 스승을 몰아친다. “모든 것은 용서 받는다 했던 당신이 이제 와서 왜 그렇게 떨고 있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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