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명함이 이력서가 되어 명분 있는 메이커를 나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류사회 속에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돼지가 양몰이 개가 된 것처럼 착각하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건은, 유대인은 이상하게 생각할 여유가 있었으나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양심이 말살되어졌다는 것입니다.어떻게 하여 배운 적이 없는 저 사람은 배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신비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너는 무식한 사람이야, 정규 신학을 하지 않는 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라고 무시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있었다면 깜짝 놀랄 사건을 체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열정적으로 목사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이유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란 표어를 간판으로 내세운 자신이 백마 탄 왕자의 기다림이 결국 행복할 수 있는가.
우리의 이상향인 꿈의 실현의 도래가 과연 행복한 것인가.
그러기 위해 진력을 다해 완벽하게 준비하나 자신이 행복할 것인가. 그런데 배운 적이 없는 예수님의 답변이 이해가 되는 것인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고 하신 말에 지금까지의 우리의 노력으로 쌓아놓은 돌무덤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우리를 보내신 분의 이야기라고 하면서 지금 내가 잘난 체하고 주문 외우듯 하는 자신의 것들이 행복할 수 있는가?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듯 하나님의 종말론적 세상을 멸망시키고 양과 염소를 구별하려고 날카로운 검을 가지고 나타나실 것이라고 공포의식을 고조시키는 목사들의 절대적인 그 말대로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가.
지금 당하는 고통을 사실 지나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금새라도 해결될 것 같은 해결사가 온다고 한들 행복해질 수가 있는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우리 하나님이라는 말로 위로받으려고 하는 힘센 빽을 가졌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예수쟁이들의 이야기들이 맞는 것인가?
중들이 찾는 말대로 ‘나미아불타불관세음보살’이라는 용어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평안을 주는 것인가 그런 일에 능숙한 예수쟁이들이 말끝마다 우리 하나님을 부른다고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가.
결국, 하나님이 인류가 원하는 그런 평안과 행복을 줄 수 있는 분인가 말입니다.
돼지가 샴푸와 린스를 뿌려서 샤워했다고 깨끗해지는 것인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 속에 왜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가?
분명히 헌금이라고 하는 명목으로 걷어서 기업을 경영하는 장사꾼에게 투자하여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방송국에 고발한 일을 예수쟁이들의 이야기라고 그냥 두어야 하는가?
최소한 백일하에 드러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는 일이 기독교를 폄하하는 일인가. 나를 구하려고 오는 백마 탄 왕자가 오면 백설공주의 한 맺힌 한을 풀어주는 것인가?
그래서 목이 터지라고 통성기도하고 이름 붙여서 두 손들어 목청을 돋우어 악을 써야 하는 제 꼴도 엇갈린 몰골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댄다고 되는 것인가.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롬 10:4).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진정한 모습이 없기 때문에 열심이라는 뱀이 내어놓은 조건에 휘말림이란 이유가 마약 중독자와 같은 혈안이 된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는데 어떻게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허망한 열심을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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