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왕들이다
그러나 그 왕도에 익숙치 못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왕도는 섬기고 살리는 일이다
그때 인생은 부요해지고 충만해진다
우리 신자들은 우리가 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갖고 왕 다운 언행을 하며 살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그가 창조하신 만물을 그를 대신하여 다스리는 자 대리통치자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고대 근동 세계 사람들은 왕을 가리켜 신의 형상이라고 불렀다. 왕의 기능이 신을 대신한 지상 통치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는 사람이 왕이라는 의미이다. 시편 기자는 바로 이점을 염두에 두고 사람을 가리켜 “관”을 쓴 존재라고 지칭한다(시 8:6). 여기서 “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타라”는 “모자, 왕관”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시고, 그를 왕으로 세우시고, 세상 만물을 그의 발아래, 곧 통치 아래 두셨음을 깨닫고, 사람을 향한 그의 배려에 대하여 놀라고 찬양한다(시 8:5-6). 아담은 창조 시부터 대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한 왕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하나님(대왕)-아담(왕)-만물의 위계질서가 있는 조직 세계임을 알 수 있다.
만물이라는 어휘가 “콜 츠바암”(모든 그들의 군대, 창 2:1)의 해석적 번역이며, 군대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일종의 상명하복의 위계질서가 있는 전형적인 군대의 조직처럼 창조된 세계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조직은 바로 (강대국의) 대왕-(분봉)왕-(약소국의)백성의 질세 체계로 이루어진 고대 근동의 봉건체제를 유지시켰던 계약관계와 서로 유사성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께서 대왕이 되시고, 아담은 왕, 그리고 백성들은 신민이라고 보고, 하나님 앞에서 아담, 곧 인간은 그가 다스리고 돌봐야 할 만물과 언약적 연대성을 이루고 있어서, 아담과 생사를 같이 하는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이 그의 대왕에게 충성하면 아담과 언약적 연대성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이 아담과 함께 복을 받고, 반면에 아담이 그의 대왕이신 하나님께 반역할 때는 만물은 아담과 함께 대왕의 언약적 저주와 심판을 받고 멸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창조시부터 왕이었고, 우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아담과 함께한 만물의 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은 결국 아담의 타락을 불렀고, 사람은 아담과 함께 타락한 왕이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된 괴물이 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왕이지만 대왕이 되고자하는 탐심과 역심으로 오히려 죄와 죽음에 갇히게 된 반역의 왕이 된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만물이 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처형을 기다리는 타락한 왕과 만물에게 구원은 오로지 대왕이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밖에는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대신한 새로운 왕을 세우고, 그가 아담의 죄 값을 치르게 하고, 그를 통하여 새로운 왕국을 세우는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새 왕에 대하여 첫째는 여자의 후손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 따라서 여자의 후손인 사람인 동시에 뱀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영적인 존재를 제압할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신적 존재이다. 따라서 그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진 사람임을 암시하신다. 따라서 새 아담은 처녀의 몸에서 낳게 될 “임마누엘”임을 계시하시고(사 7:14), 전능하신 하나님, 평강의 왕으로 소개한다(사 9:6). 말하자면 “사람”(인자)의 아들”(Son of Man)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새 아담이 왕이라는 것이다. 아담이 왕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 아담도 왕이어야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새 아담을 중심하여 새로운 왕국을 세우려고 하시기 때문에, 새 아담은 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 아담은 다윗 왕의 후손으로 계속 언급되고 있다 (사 9:6-7; 11:1).
이사야 9장에는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하여 태어났는데, 그는 어깨 위에 통치권이 있고, 이름은 위대한 섭리자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며 평강의 왕이라는 것이다 (9:6). 대왕이신 하나님과 그 권위와 능력이 동일하신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셋째로 그는 아담의 죄 값을 치러야 할 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아담이 죽든지, 아담을 대신한 다른 존재가 대신 죄 값을 치르든지 해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서고, 권위가 보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역할을 대신해야 할 새 아담이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신 것이다. 새 아담은 아담의 범죄를 대신하기 위하여 매맞고 고난당하고 죽어야 한다. 그러나 부활해야 만이 죄 값이 온전히 치러졌음이 증명될 것이다. 왜냐하면 새 아담이 옛 아담의 죄 값을 온전히 치렀기 때문에 더 이상 죄와 죽음의 권세가 새 아담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53장은 바로 새 아담의 속죄 사역이 잘 예언되어 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아담을 대신한 새 왕이 되기 위하여 이 땅에 와서 고난당하고 죽고 부활하셨다. 그리하여 왕, 그리스도가 되셨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언했다(행 2:36). 물론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전에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고백했었다(마 16:16). 그리스도라는 말은 왕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따라서 골로새서 1:15은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왕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그의 형상으로 만드셨듯이, 새 아담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 보좌들과 주권들과 통치들과 권세들이 그 안에서 창조되었고 만물이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그가 바로 만물의 으뜸, 곧 머리라는 것이다. 새 아담이 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주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왕이라는 사실은 별로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우리의 왕 되심을 인식하고 믿고, 대우하고, 그를 경배하며 충성하며 찬양해야 한다. “왕의 왕, 주의 주”라고 찬송하고 영광을 그에게 돌려야 하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로운 왕국을 세우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새 나라의 왕으로 임명하셨다. 따라서 타락한 왕, 아담과의 연대성 아래서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은 이제 새 아담, 새로운 왕 앞에 나와 그가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고백하면 그는 새 왕국,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자가 되면 그리스도의 백성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이 되는 것이다. 롬 5:17에는 “한 사람의 범죄로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다스렸다면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은 더욱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스리다”는 말을 헬라어 “바시레위오”(βασιλευ、ω)를 번역한 것인데 “왕이 되다”(be king), “다스리다”(rule), “통치하다”(reign) 등의 의미이다. 개역성경에서는 “왕노릇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은혜와 선물을 받은 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 곧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과의 언약적 연대성을 이룬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죽음을 무기로 왕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왕, 생명을 살리는 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고,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이룬다. 예수님과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성령으로 인치시고, 인증하는 예식이 바로 세례이다. 예수께서 왕이 되셨으며,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예수님과 함께 한 왕이 된 것이다. 로마서 8:14-17에는 누구든지 하나니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고 했다.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이 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왕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왕이 되지만, 실제로는 왕으로서 실감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하고, 왕이라는 자부심이 없이 살아 살아간다. 비록 우리는 세상 나라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지만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왕답게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이 세상 나라를 다스리는 세속적인 왕이 있는 반면, 공의와 정의로 세상을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왕이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왕은 돈과 권세를 가지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자기의 종으로 삼고 싶어한다. 그래서 세상의 권세를 탐하고,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왕이 되고 싶어 한다. 남을 죽이고 자기가 살고자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세상의 권세와 부와 명예를 탐하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작은 자가 되고, 섬김을 받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대속물로 주고자 한다고 말씀하신다 (막 10:42-45). 그는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매맞고, 찢기고, 상처받고, 고난 받으시며,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셨다. 새 하늘, 새 땅, 새 나라의 왕이신 예수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죽어가는 인생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 제물로 주시겠다는 말씀은 이 세상의 도리는 아니다. 이 세상나라는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고, 자기가 섬김을 받기 위하여 남을 짓밟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섬기고 살리는 나라이며, 왕은 예수님처럼 섬기고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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