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은 중생하지 못한 자의 영역 곧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땅이다. 우리는 그곳을 멀리멀리 탈출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경계로 이스라엘 민족과 애굽인을 구별하셨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의 모형이라고 하셨다(고전 10:1-2). 세례받기 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었고 애굽의 백성들이었다. 누구든지 거듭나고 변화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이 없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곁에서 멀리 떠나기를 원치않았던 것같이 사단은 언제나 성도들이 자기 곁에서 멀리 떠나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멀리 가지 말라’는 이 사단의 미혹을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왜 그러해야 하나?
결혼 할 때 부부는 배우자에게 인생 전체를 놓고 헌신을 약속한다. 서로를 위해 살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같다. 따라서 우리는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드린 헌신을 잊지 말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홍해를 건너온 후에 그들에게 “너희가 오늘 본 애굽인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2)고 외친다.
홍해를 건넌 후 앞을 향하여 3일 길을 간 사람은 가나안 약속의 땅이 더욱 눈앞에 가까이 다가오지만 애굽에서 멀리 떠나지 아니한 사람은 어떤 어려운 고난이 닥쳐올 때에 애굽으로 되돌아 갈 위험성이 많다. 이것은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사단의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굽을 조금 떠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애굽을 단절하고 가나안으로의 행진을 계속해야 한다.
마지막 때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온적 상태로 배교자가 나타나는 것은 사단의 세속주의 유혹 때문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아뢰되 너희는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다급해지자 타협안을 제시한다.
만일 이 타협안을 받아 드린다고 가정해 보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워주신 언약이 무엇 이었나? ‘구원자 메시야를 보내리라. 땅 (가나안)을 주리라.’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구원)을 얻으리라는 세 가지로 요약이 된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천하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그리스도가 태어나실 가나안 땅으로 인도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리는 것으로 사탄은 악착같이 애굽에 붙잡아 두려고 발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한 마디로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고 거절을 한다. 애굽에 머물면서 바로와 하나님을 주로 섬기는 것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출 8:27). 11절 애굽은 이 세상의 모형이고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형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애굽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감사와 찬양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애굽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분은 하나님의 선민들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는 출애굽 한다고 하면서 마음은 데마처럼 세상에 속해 있다. 우리는 애굽을 떠나 사흘 길(출 8:27)을 걸어야 한다.
모세가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라고 말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죄를 버리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관습들을 타파할 만한 결심을 나타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방식대로 예배를 드려야만 한다.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하는 이 중 생활은 불가능하다.
불완전한 예배를 탈피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섬기기로 다짐하는 자만이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의 모형이라고 하셨다(고전 10:1-2). 세례받기 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었고 애굽의 백성들이었다. 누구든지 거듭나고 변화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이 없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곁에서 멀리 떠나기를 원치않았던 것같이 사단은 언제나 성도들이 자기 곁에서 멀리 떠나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멀리 가지 말라’는 이 사단의 미혹을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왜 그러해야 하나?
결혼 할 때 부부는 배우자에게 인생 전체를 놓고 헌신을 약속한다. 서로를 위해 살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같다. 따라서 우리는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드린 헌신을 잊지 말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홍해를 건너온 후에 그들에게 “너희가 오늘 본 애굽인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2)고 외친다.
홍해를 건넌 후 앞을 향하여 3일 길을 간 사람은 가나안 약속의 땅이 더욱 눈앞에 가까이 다가오지만 애굽에서 멀리 떠나지 아니한 사람은 어떤 어려운 고난이 닥쳐올 때에 애굽으로 되돌아 갈 위험성이 많다. 이것은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사단의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굽을 조금 떠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애굽을 단절하고 가나안으로의 행진을 계속해야 한다.
마지막 때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온적 상태로 배교자가 나타나는 것은 사단의 세속주의 유혹 때문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아뢰되 너희는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다급해지자 타협안을 제시한다.
만일 이 타협안을 받아 드린다고 가정해 보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워주신 언약이 무엇 이었나? ‘구원자 메시야를 보내리라. 땅 (가나안)을 주리라.’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구원)을 얻으리라는 세 가지로 요약이 된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천하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그리스도가 태어나실 가나안 땅으로 인도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리는 것으로 사탄은 악착같이 애굽에 붙잡아 두려고 발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한 마디로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고 거절을 한다. 애굽에 머물면서 바로와 하나님을 주로 섬기는 것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출 8:27). 11절 애굽은 이 세상의 모형이고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형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애굽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감사와 찬양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애굽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분은 하나님의 선민들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는 출애굽 한다고 하면서 마음은 데마처럼 세상에 속해 있다. 우리는 애굽을 떠나 사흘 길(출 8:27)을 걸어야 한다.
모세가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라고 말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죄를 버리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관습들을 타파할 만한 결심을 나타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방식대로 예배를 드려야만 한다.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하는 이 중 생활은 불가능하다.
불완전한 예배를 탈피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섬기기로 다짐하는 자만이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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