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알고 있는 것이나 아는 척하는 것이 성령의 감동에서 온 것인지 네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가 예수쟁이라면 양심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너는 네 속마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고 있지 않으냐? 지금 치매나 변비 환자 입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눈이 밝아지기 위함인지,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서, 선악을 알게 되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너 자신은 알고 있지 않으냐? 라는 것입니다.내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가?
목사가 제사장인 척하고 있지 않으냐? 너는 네가 치매인지 변비인지 자기증상에서 알고 있지 않으냐?
지금 우리의 유창한 변론 속에 예수님이 소개되고 있느냐? 정말 양심적으로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입니다. 왜냐하면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내 것이 아니어야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곧 우리의 자유이면서 수월함입니다. 생명 자체가 이론이 아니라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즉각적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만이 가진 특성이 보내신 이의 것이기에 상대적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인 것입니다.
상황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명입니다. 사명은 자아의식이 걸림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입니다.
지금까지 꿈을 깨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여유 없는 극단적임을 말했습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영광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수다스럽게 말하고 밤새워 써놓은 글들의 목적은 자기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시키고 은혜로운 설교라고 해도 상담하고 바르게 가르치려고 하는 모두가 나 잘난 것에 대한 변증입니다.
그런 것들 모두가 우리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겸손하게 “내 생각입니다”라는 말 자체도 스스로 말한 것입니다.
만일 진정한 주님과의 관계라면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내 삶의 변화일 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형편에 내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지금처럼 핸드폰을 하고 문자를 보내겠습니까?
지금까지 행한 일은 자기가 빠진 것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하는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참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됨에 대한 결과가 그 속에 불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불의가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 자체에서 믿음의 진정한 의미가 불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불의의 증거는 학문입니다. 왜냐하면, 학문 자체가 남의 이야기와 자기의 변호이며, 합리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곧 생명적인 삶인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확신을 주는데 곧 실천법칙입니다.
사랑이란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희락이란 자기가 있는데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화평이란 자기의 손실에 무관심한 것입니다.
인내란 자기 곤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비란 자기권리를 눈감아 두는 것입니다.
양선이란 자기감정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충성이란 자기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온유란 자기 장점을 잊는 것입니다.
절제란 자기욕구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 희락, 화평이고, 사람 관계에서는 인내, 자비, 양선입니다. 나 자신에서는 충성, 온유, 절제, 성령의 열매가 곧 개혁주의생명신학입니다. 그 자체가 기도입니다.
ⓒ 교회연합신문 & www.ecumenicalpress.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