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시편 23편 1절에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자기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키며,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눕게한다”(야르비체니), “인도한다”(에나할레니; 얀헤니), “소생시킨다”(에소뱁) 등의 동사가 사용되고 있는 데, 특히 여호화를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다. 동사 “숲”은 “돌아오다”(return) 의 사역형으로 쓰여져, “돌아오게 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메이 메뉴홋”은 “잔잔한 물가”로 번역하는 것 보다는 “쉴만한 물가”(refreshing water)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여기서 “영혼‘은 무엇이며, 영혼이 어디에 갔기에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그 모양을 만드시고 그 코에 “니쉬맛 하임”(생명의 호흡)을 코에 불어 넣으셨다. 그러자 사람이 “네패쉬 하야”(생명체)가 되었다. 개역성경은 “니쉬맛 하임”을 “생기”로 “네패쉬 하야”는 “생령”으로 번역하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께서 생기라는 특별한 기운을 흙으로 빚은 사람의 코에 불어 넣으므로 사람이 “생령”이라고 하는 영적 존재가 되었다고 해석하고 믿는다. 그러나 “네패쉬 하야”라는 말은 생명체, 영어로는 living soul, living being, living creature 라는 말이다. 여기서 living soul은 일반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 혹은 피조물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므로 그것이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의 어떤 본질적인 구성요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네패쉬 하야”는 사람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함께 쓰여지고 있는 어휘이다(창 1:20, 24, 30; 2:19). 이 경우 “네패쉬”를 “영혼”으로 번역하면, 마치 동물들도 사람처럼 영혼을 가진 존재로 오해하기 쉽다. 따라서 한글 역본에서는 “생물”로, 영어로는 “living creature”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는 다같이 “네패쉬 하야”를 쓰고 있기 때문에 마치 사람과 동물 사이에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주장하거나 동물도 사람과 같은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동물도 “네패쉬 하야”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과 같은 이성과 감성과 지능을 가지고 있고, 어떤 동물은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생명체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 이외의 어떤 피조물에게도 그 코에 생명의 호흡을 넣어주셨다는 언급이 없다. 흙으로 빚은 사람의 형상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그 코에 불어 넣음으로 살아 움직이는 육체가 되었다, 따라서 사람은 육체와 더불어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생명체이다. 그래서 사람은 육체와 구별되는 요소로서 “영혼을 가진 존재,” 말하자면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네패쉬 하야”를 “영혼”이라고 번역을 할 경우, 이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생명의 호흡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생명체와, 동물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이 주어지지 않는 생물을 다같이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용법에 주의해야 한다. 말하자면 “생물”을 사람과 같은 “영혼”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또한 여기서 분명한 것은 창세기 2:7은 결코 사람의 구성 요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의 호흡을 그의 코에 불어 넣으시고,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존재이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이고,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존재이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우리 어머니와 탯줄로 연결되어 생명이 유지 되었고, 이 세상에 나와 탯줄을 끊어도, 우리 마음속에 어머니의 존재와 그 품속을 떠날 수 없듯이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과 그러한 관계를 가진 존재이다. 우리는 영혼아 있는, 곧 생명의 호흡이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체이다. 따라서 생명의 호흡이 끊긴 인간은 흙덩이에 불과하다. 영혼이 떠난 인간은 생명이 없는 죽은 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곧 네패쉬를 소생시키셨다고 말한다. 소생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면 그의 영혼이 죽어가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다. 다윗의 생애가 결코 평안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사실 다윗은 그의 아비 집에서 목동 생활을 할 때를 제외하면 블레셋 사람, 골라앗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민족의 영웅이 된 이후,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고, 죽을 때까지 하루 한 날 평안한 날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다윗의 인생이 결코 꽃 방석에 앉아 신선놀음을 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 안에서 부요함을 누린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의 목자로 묘사하며, 그 목자의 보살핌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받아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한번 돌이켜 보면 다윗이 누비고 다녔던 유다 광야에 푸른 초장이나 잔잔히 흐르는 물가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이 시는 현실적인 자기의 모습을 적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시적인 표현이고 비유라고 해야 맞다.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돌이켜 보면서 그는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인도해주셨다는 고백적인 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동안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고, 40년 동안의 광야 훈련을 거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한 역사적인 사실을 돌이켜 보며, 그들을 목자처럼 인도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는 고백적인 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이 시의 시제(tense)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번역자들은 1절은 미래형, 그리고 나머지는 현재형으로, 그리고 어떤 곳은 시제를 구분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P. C. Craigie (WBC) 는 원문을 잘 살려 모두 미래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경우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자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과거처럼 그들을 돌보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실 목자가 될 것임을 확신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을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로 소개하며, 자신은 목숨을 내어놓을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바로 하나님, 곧 하나님-목자로 소개하고 선언하신다(요한 10:15, 18). 그리고 목마른 영혼들에게(시 42:1) 자기에게 나아와 참 쉼을 얻으라고 초청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에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 11:28-29)
여기서 예수께서는 인생살이에 피곤하고 지친 자들에게 영혼의 안식, 곧 영혼의 쉼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고, 생명수이며, 더 나아가 그의 살과 피가 바로 영원히 살게 할 참된 양식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참되 음료라고 말씀하신다(요한 4:14; 6:31; 54-56). 아마도 다윗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고, 마시고 마셔도 목마른 이 세상의 떡이나 세상의 물과는 다른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분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기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자기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래형으로 말한다. 다윗이 찬양하고 감사하는 목자는 현재 목 마르고 배고픈 인생들에게 잠간 주린 배를 채워주고, 마른 목을 추겨줄 수 있는 모세와 같은 목자라기보다는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명의 양식을 주실 목자, 그의 피곤한 영혼에 참 휴식을 줄 수 있는 목자를 바라보고 이 시를 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바로 그 “생명의 양식”이라고 응답하시고, 자기가 그 양식을 주실 수 있다고 선언하신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 데,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요 10:53-56)
다윗은 그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성경에서 “의”(righteousness)라는 말은 보통 구원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표현은 예수님과의 뗄려야 뗄 수 없는 최고의 관계, 곧 최고 극치의 “의”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예수께서 영혼의 양식을 주셔서 우리의 생명이 풍성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살려 참다운 의의 관계로 인도하실 선한 목자시라는 것이다. 다윗은 분명 이러한 목자를 마음에 두고, 그리면서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부족함이 없으리로다)”(I shall not want)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목자가 참 목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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