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우리가 이렇게 살게 된 것은 지나 온 수많은 시간들과 세월들 속에서 인류의 조상들이 살아 온 결과로서의 오늘이다. 적어도 역사적 삶의 실체가 발견 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 것처럼 우리 민족의 조상들의 삶의 연속성과 지속적인 것들로부터의 오늘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로서 존재하는 역사이고 우리에게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미래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어떠한 형태의 역사의 창작물들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뜻한 바 그 목적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다다. 삼위일체의 신학적 교리의 하나님은 단순한 교리의 틀 속에 머물러 있는 갇혀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들과 창조물들을 아직 빚어내고 계시는 우리와 삶을 동해하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초대교회 이후 중세를 거치면서 신과 교회 이름으로 혹은 성직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 콘스탄틴 대제의 로마가 기독교와 교회를 공인한 이후로부터 교회는 세속의 권력과 함께 해 왔다. ‘성과 속’이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듯이 교회와 세상이 분리되어서 존재하지 할 수 없다. 그것은 한 역사와 삶의 현장에서 공존하고 때로는 대립하고 서로 각자의 길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두 얼굴이다.
거룩과 세속의 장부를 서로가 지니면서도 서로가 필요한 존재로써의 세상 속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면서도 여전히 세상 속에 발을 딛고 그 세상과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초월을 말하고 그 초월을 추구하고 동경하면서도 여전히 이 낮은 세상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묻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적 존재인 것이다.
인간들이 고통과 고난의 세월을 지날 때에 각종 이단들과 사이비들은 그 고통과 고난의 나약함을 파고들어 민중들의 고혈을 짜고 거짓된 신의 이름으로 착취를 멈추지 않는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사이비와 이단들은 삶의 고난의 현장들을 공략하여 침략하는 근성을 버리지 못한다. 소위 권력과 자본가들은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민중들을 자신들에게 아부하며 기생하는 허위의식의 지식인들과 종교인들과 공존을 모색하며 민중들을 속이고 억압, 착취하는 일에 끌어 들여서 악한 연대를 쉬지 않는다.
교회와 종교가 이러한 민중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며 그들의 생존과 존엄성을 짓밟는 자본과 권력에게 아부 아첨하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 하였다. 우리가 그 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고 잘리어 버려지면 불에 태워지는 땔 감이 상 아무 것도 될 수 있다.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기 때문이다. 남북의 평화와 통일의 길이 열리면 자본과 그와 아부 공생해 오던 교회들, 종교들이 북을 향하여 자기 자리 확대를 꿈꾸고 설계할 것이다. 어디 좋은 자리에 자신들이 축적한 자본들을 통하여 교회당을 짓고 기도원을 짓고, 등등 각 교파와 교단들 개 교회 중심의 선교의 명분을 앞세워 아귀다툼을 할 것이다.
도대체 이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인가? 지금까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 왔는가? 다시 각 종파 별로 각 교파 별로 서로 세력 다툼을 북쪽에다 심고자 혈안들이 될 것이 불 보듯이 뻔하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통일이 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저 교류와 왕래를 하면서 하나의 민족, 두 체제로써 한반도에서 공존하는 상부상조의 삶으로 족하면 어떨까?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기독교 왕국을 바라는 추악한 모습은 아니다. 서로를 배제하고 배타적인, 자본과 권력과 체제에 아부아첨 하는 그러한 기독교와 종교적 통일을 바라지는 않는다. 역사적 예수 베들레헴 떡집에서 태어나서 갈릴리 민중들을 치유하고 사랑했던 예수, 버려지고 병들고 떠돌이. 고아와 과부, 나그네들을 사랑하셨던 예수, 그 예수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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