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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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는 나무들이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왕을 세우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 들은 올리브 나무에게 가서 말하였습니다. ‘네가 우리의 왕이 되어라.’ 그러나 올리브 나무는 그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그래서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라.’ 그러나 무화과나무도 그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어찌 달고 맛있는 과일 맺기를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그래서 나무들은 포도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라.’ 그러나 포도나무도 그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 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그래서 모든 나무들은 가시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라.’ 그러자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정말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너희의 왕으로 삼으려느냐? 그렇다면, 와서 나의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가시덤불에서 불이 뿜어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 버릴 것이다.”(사사기 9장 8절-15절)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해낸 카리스마적 영웅 기드온에게는 70인의 자식이 있었다. 기드온이 죽자, 평소에 서자 취급을 받던 아비멜렉이 나서서, 70인이 다스리는 것보다, 자기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낫지 않느냐며, 사람들을 부추기고, 은 70개로 건달들을 매수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리하여 아비멜렉이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칭호를 차지하게 된다.
첫머리에서 인용한 “비유”는 기드온의 아들 중에 학살을 면한 막내아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가 서서, 아비멜렉을 따라 백성들이 일으킨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마뜩찮은 일임을 백성들에게 알리자고 들려준 비유이다.
요담이 호소한다. “여러분이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이 일이 어찌 옳고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나의 아버지는 여러분을 살리려고 싸웠으며, 생명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분을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서 구하여 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이제 여러분은 나의 아버지의 집을 대적하여 일어나, 일흔 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들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우리 아버지의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을 여러분의 혈육이라고 하여서, 오늘 세겜 성읍 사람을 다스릴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요담은 그 길로 브엘로 가서 피하였고, 아비멜렉은 이스라엘을 세 해 동안 다스렸다.
악을 다스리는 것도 악이라 했던가. “그 때에 하나님이 악령을 보내셔서, 아비멜렉과 세겜 성읍 사람들 사이에 미움이 생기게 하시니, 세겜 성읍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기드온의 아들 일흔 명에게 저지른 포악한 죄과를 이렇게 갚으셨는데, 자기의 형제들을 죽인 피 값을, 아비멜렉에게, 그리고 형제들을 죽이도록 아비멜렉을 도운 세겜 성읍 사람들에게 갚으신 것이다.”
악이 오른 아비멜렉은 자기를 순종하지 않는 세겜 사람들을 죽이고 소금을 뿌리는가 하면, 지하 동굴에 피해있는 사람들을 불살라 죽였다. 그러나 끝내 아비멜렉은 한 여인이 내던진 맷돌 위짝에 맞아 죽는다. 그가 마지막으로 졸병에게 남긴 말은 “네 칼을 뽑아 나를 죽여라! 사람들이 나를 두고 여인이 그를 죽였다는 말을 할까 두렵다.” 이었다.
파스칼은 인간이 지닌 가장 큰 악덕은 ‘자기사랑’이라 했다. “인간은 ‘자기사랑’으로 해서 타자 앞에서는 결함에 찬 자신을 미화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그 참 모습을 위장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자아는, 자신의 결함을, 자신은 물론 타자에 대해서도 감추기 위해 갖은 배려를 다한다. 그 결함이 타자에게 보이게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파스칼이 한 친구와의 대화를 가상한 이야기에서, 친구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만 대한다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을 것이 아닌가.” 하자 파스칼이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이러한 우호적 자세는 타자의 눈에 비치는 불쾌감을 덜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아의 근본적인 ‘부정’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웃에 대한 보은과 배려는 위장된 것일 뿐인 것을.”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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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나무와 가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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