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민족주의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혁명에서 처음 발현되었다. 17세기 영국의 민족주의는 후대에 나타난 세속적 민족주의보다 종교적인 성격이 짙었으며 상업에 종사하는 중산계층의 성장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존 로크는 영국 민족주의의 정치철학을 집대성했고 18세기 미국 및 프랑스 민족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민족주의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혁명을 기하여 만개하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두 체제 간에 세계적인 양대 결의 결과로 세계는 이념을 세워 서로 싸워 왔다. 이러한 그 사회적인 성격의 차이로 그 과정과 그 경로가 얼마큼 달라져 왔는지를 알게 한다. 예컨대 세계는 그동안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으로 많은 변화 과정을 가져왔다. 이 과정은 삶의 존재 양식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오늘날에는 농어민들의 삶의 양식이 산업구조 조정과 도시화 전략으로 삶의 터전이 바뀌어 왔음을 실제로 존재 양식이 많이 바뀌고 있음을 알게 한다.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띠는 민족감정의 발흥으로 인해 첫째, 절대군주가 등장하여 중세 봉건사회의 지방 분권주의를 타파하고 영토 확장과 함께 중앙집권적 국가를 탄생시켰으며, 둘째, 생활 및 교육의 세속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국어가 유행하고 교회와 종단의 구속력이 약해졌으며, 셋째, 상업이 발전됨으로써 중산 시민계층과 자본주의적 기업형태를 창출해냈다. 정치적·경제적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영토적 통일국가에는 중세의 종교운동에 견줄 수 있는 열정이 스며들어 있었고 국가의 중심으로 자처하고 있던 군주는 국민주권 이론과 인권사상에 밀려났다. 군주는 더 이상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었고 국가는 국민의 국가, 민족적 국가, 조국이어야 했다. 국가는 민족과 동일시되었으며 문명은 민족적 문명을 의미했다. 한편 제국주의의 핍박을 받고 있던 식민지*반식민지에서는 새로운 민족주의가 혁명적 식민지로 있었다. 민족주의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식민지 세계의 전역에 퍼져나갔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고전적 민족주의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었다. 고전적 민족주의는 자본주의가 봉건세력의 억압에 항거하여 성장하는 과정에서 탄생된 민족주의였으므로 한결같이 반봉건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식민지 민족주의의 경우는 보다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무르익어 제국주의의 단계로 접어든 시기에 제국주의의 압제로 신음하던 식민지에서 일어난 것이었으므로 대개 식민지 민족주의에는 반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과거 일제하에서 일어났던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이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드 생 시몽은 빈민의 처지를 염두에 둔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여기에 종교적 윤리적 확신을 결합시키려는 운동으로 알기도 했다. 여하 간에 이러한 그 시대의 풍조와 그 시대의 유행의 시류를 알게 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기독교 사회주의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형편에 의해 1889년 ‘그리스도교사회주의자협회’가 조직되기도 하였으며 20세기 초 몇 년 동안 구원의 사회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사회복음운동이 번창했음을 알게 한다. 여한 간에 제1차 세계대전 후 기독교 사회주의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한편 폴 틸리히와 같은 신학자를 포함한 또 다른 그룹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유사성 및 맹점을 발견하기 위해 19세기 그리스도교 사회윤리를 근대 산업사회에 적용하려는 교의와 그 운동을 알게 한다. 19세기에 일어난 이유는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전체의 이익을 위한 정치 경제 활동을 주장하는 연관되어 있었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공동 소유나 생산, 교환수단의 통제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카톨릭사회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봉건적 협동조합 제도로서 통상의 사회주의와는 전혀 별개의 질서이다. 19세기에 그리스도교 사회윤리를 근대 산업사회에 적용하려는 교의와 그 운동을 알게 한다.
한편 폴 틸리히와 같은 신학자를 포함한 또 다른 그룹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유사성 및 맹점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제는 한국 분단의 역활에 대해서 용서를 선언하고 6.25전쟁의 와중에서 서로가 당했던 증오를 용서하고 남과 북이 “서로 화해”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한 민족의 신뢰성회복으로 여기에 서로 희망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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